영희

by 조은이

내게도 남자가 있었어요. 그는 내 시작과 내가 살았던 담장 안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현재 지금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어요. 우리는 여러 해 많은 시간 사랑을 나누었죠.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한 기다림은 울타리 없던 내 삶에 나지막한 담장을 만들어, 담장을 둘러 꽃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복이었어요. 하지만, 그는 다니던 일자리를 잃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나는 그를 위로하고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그는 내가 살던 단칸방 보증금과 써야 하는 얼마의 생활비로 가지고 있던 현금까지 훔쳐 잠적해 버렸어요. 일자리를 잃고 잠시 불안해진 마음으로 한 행위라 여기고 가지고 간 돈이 떨어지면 돌아오겠거니 그를 믿고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고시원을 전전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급한 마음은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어둠 속 불안의 천둥소리는 점점 또렷하고 커지는 것 같았어요. 그가 변한 것인지 처음부터 나를 기만(欺瞞)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진심을 듣고 싶어 힘들게 그를 찾아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어요.

그는 병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현실이라고 했어요. 고아 출신,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순간, 명문대를 나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일한 희망인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처음에는 좋은 감정이었지만, 어느 때부터는 그저 섹스 파트너로 만남을 지속했을 뿐, 솔직하게 결혼 같은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했어요. 내게서 가지고 간 돈은 그동안 자기가 내게 썼던 돈을 가지고 온 것뿐이라며, 얼마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자기를 찾아왔다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기까지 했어요. 그의 진심인 것 같지 않아 그에게 함께 이겨내자고 설득하고 매달렸지만, 그는 내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어요.

“너는 어차피 버려진 존재였잖아. 내가 너와 만남을 시작했던 이유는, 언제든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였어.”

사랑을 나눌 때마다 속삭였던 수많은 사랑의 언어들은 다 거짓말이었고,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으면 이 순간부터 함께 만들어 가면 된다던 친절한 그의 말은 자기 오만에 불과했어요. 그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 진심이었다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함께 할 수 있었는데… 그에게 거절당하고 버려진 마음은 한참 동안 회복되지 않았어요.

왜 나는 처음부터 분리된 생명으로 왔는지? 누구에게 어디에도 원망조차 할 수 없는 내 처지와 현실이 슬프기만 했어요. 어차피 버려진 존재는 거듭 버려져도 괜찮다는 것인지? 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여 준 것이 버려져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세상 누군가에게 ‘나’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과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감에 갇히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라는 존재의 출발선을 모른다는 것은 결승선 없는 트랙을 돌고 있는 것 같은 고단함의 연속이었어요. 나는 나 스스로 어떤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세상 속에 속해질 수 없는 존재로 우울의 철창에 갇혀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나를 다른 모양으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급증이 나를 행동하게 했어요.

화장기 없는 수수한 외모에 화장술로 가면을 씌우고, 카드 할부로 사들인 값비싼 옷가지로 겉모습을 만들어 냈어요. 세상에서 만나고 스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직업을 가진 부모를 만들어 자랑하고, 나는 그런 부모님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귀하고 사랑스러운 딸이라 말했죠. 내 잠시의 수고와 노력이 얼마 되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나를 급속하게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사회 상류층 지식인 부모의 외동딸로 명문대를 나왔지만, 인성마저 소탈해 보잘것없는 아르바이트에도 열심을 내는, 누구에게나 구김 없어 보이는 영희가 되어 있었죠. 그런 내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와 관심을 표현하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어요. 세상 사람들은 사실과 진실을 보는 것보다 자신들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을 말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 세상은 어쩌면 플라스틱처럼 무엇으로든 변형이 가능한 인간을 열망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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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어요. 그는 대학 입학을 전후로 어머니를 잃었다고 했어요. 그래도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학업을 마치고, 전문직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어요. 나는 속으로 계산했어요. 그에게 가족이 있어 그들까지 속이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을 것 같았지만, 차라리 혼자여서 다행이라 여겼죠.
헤어진 예전 남자와는 작고 초라한 자취방이나 변두리 여관방을 전전하며 사랑을 나누었지만, 이 남자는 처음부터 호텔 스위트룸에서 내 육신을 취하고 자기 여자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생명을 잉태했고, 그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꽃다발을 안기며 청혼했죠. 그때 잠시 갈등했어요. 이 남자에게 나에 대한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하나? 하고요. 하지만, 그다음에 어떤 상황으로 몰릴지, 어떻게 버려질지 예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참회가 아닌 모면을 선택했어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부모와 거짓으로 말한 내 환경을 무마하기 위한 다른 거짓의 상황을 생각해야 했어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부모님에게 내가 모르는 빚이 많았다며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죠. 그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무척이나 신뢰하는 것 같았어요. 제게 거액의 돈을 내밀며 빚을 갚아 주었고, 한꺼번에 부모를 잃은 저를 위로하며 나와 잉태된 생명을 선택해 주었어요. 나는 완전한 변형에 성공했어요.


세상은 내게 사기꾼이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여자’ 당신처럼 지켜주는 창조주 보호 아래 있지도 않은데, 플라스틱이 만난 여자들처럼 괴물의 먹잇감이 될 수도 없잖아요? 세상 속에 숨어 사는 사람의 탈을 쓴 괴물들은 나처럼 엉성한 가면을 쓴 사기꾼보다, 순수한 약자를 먼저 알아보고 악독하고 잔인하게 눌러 버리거든요. 그들에 비하면 나의 가면은 생존의 절박한 수단이라 변명하고 싶어요.

나는 ‘영희’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는 그냥 처음부터 영희로 존재했고, 플라스틱처럼 목적과 쓰임이 정해진 변화는 아니지만 어디서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는 인생살이에서 그 변화에 나를 변형시켜 가며 살아 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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