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어 이루어지는 여자의 변화는 세상을 재구성시킨다고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생존을 상대해야 하는, 결코 혼자서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 세상이라고요?
‘영희’ 당신은 우리처럼 재활용되어 완전한 다른 존재로 변형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세상은 보이지 않는 당신 거짓으로 당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죠?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만들어 낸 거짓을 상상해서 믿는다는 것인가요?
철이와 민지는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났어요.
그들은 커플 옷을 맞춰 입고 반지를 나누어 끼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언어를 동원해 표출하는, 잠시 잠깐도 떨어지지 않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어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삼는 애정 행각을 보는 친구들의 시기와 질투, 교사와 주변 어른들의 절제를 말하는 잔소리에도 개의치 않는,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는 것 같았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들만의 작은 집을 마련해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아내와 남편이 되었어요. 아내와 남편의 역할은 그래요, 좀 하는 것 같았어요. 뭐든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요. 담배도 같이 피우고, 컴퓨터 게임도 같이하고, 배달 음식도 의견 충돌 없이 시켜 먹었어요. 각자 아르바이트도 해서 원룸 월세와 생활비도 함께 잘 감당하고 있었죠.
민지는 원룸 생활을 시작하면서 자기를 길러준 할머니에게 알리지 않았지만, 할머니 역시 민지에게 무심했어요. 대학에 다니고 있던 철이는 집안 어른들에게 과제가 많아 학교 근처 선배 작업실을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는 거짓말로 둘러댔죠. 철이 어머니는 철이에게 한 번씩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고, 그런 날은 집에 들어가 며칠 어머니 심기를 살피고 민지가 있는 원룸으로 꼭 돌아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민지 몸에 생명이 잉태되었어요. 민지는 예상치 못한 임신 사실을 철이가 알게 되면 철이가 어떤 반응을 할지? 까닭 모를 불안으로 철이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했죠. 혼자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병원에서 남편 동의 없는 수술은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그냥 나와야 했어요. 민지는 눈발이 날리는 길을 혼자 걸으며 떠나버린 엄마를 떠 올렸지만,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멈췄어요. 민지는 어쩔 수 없이 철이 눈치를 살피며 임신 사실을 알렸고, 철이는 민지에게 어쩔 거냐며? 짜증을 냈어요. 모든 것을 함께 했으면서 말이에요. 임신이 되던 날도 민지가 관계를 거부했지만, 철이는 그런 민지에게 반강제로 섹스를 강요해서 그렇게 됐는데, 임신의 책임을 민지에게 물었어요. 둘은 엄청나게 충돌했고 짐가방을 들고 원룸을 나가는 철이를 민지는 붙잡지 않았어요. 민지는 까닭 모를 불안의 실체를 맞닥뜨린 순간, 철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거든요.
잊히지 않는 낯선 이들의 발자국 흔적과 무심한 할머니와의 식탁, 책임과 의무감의 산물이 되어 받는 용돈과 선물, 똑같은 교복을 입은 수십 명의 닮은 꼴 학생들 속에서 같은 모양이 되어 보려 기웃기웃… 민지는 언제나 혼자 남겨져 세상을 살아 내는 것 같은 깊은 고립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철이가 살금 조심 다가와 민지 앞에 눈을 마주 보고 앉아 웃어 주었죠. 철이의 끈질기고 솔직한 고백으로 민지는 어렵게 마음을 열었고, 민지 열린 마음은 철이에게 뭔가를 정복한 듯한 승리의 기쁨을 안겼어요. 민지는 철이를 만나 함께 하면서 더는 발자국 흔적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런 그가 떠나버린 원룸에서 민지는 깊고 어두운 고립감의 구덩이로 다시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렇게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했던 관계가 하루아침에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명의 잉태가 사랑을 파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민지는 자기 몸속에 뿌리내리는 생명을 느낄 때마다 슬픔을 넘어선 분이 치밀어 술 담배에 의존하는 것 같았어요. 몸속 생명을 저주하는 것인지 자신이 처한 현실이 낙심되어 절망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곤 했죠.
그러함에도 사십 주를 채우고 생명은 살아남아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어요. 민지는 원룸 바닥을 기고 뒹굴며 고통이 반복될 때마다, 거친 욕설을 뱉어냈어요. 참을 수 없는 진통으로 출혈이 시작되고 덩어리가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질 때, 어렴풋이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아파트 베란다에 서 있던 엄마 모습이 보였어요. 엄마에게 너무 아프고 힘들다고 도와달라 울부짖었지만, 엄마 모습은 순식간에 눈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어요. 민지는 정신을 잃었어요.
시간이 지나고 의식을 찾은 민지는 자기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생명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채, 베란다 눈 속으로 사라진 엄마 모습만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출산의 고통보다 더한 내면의 혼란이 민지의 모든 것을 조각조각 분쇄하고 있었죠. 그리고,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둠이 민지를 어둠 속 아래로 끌어당겼어요. 민지는 붉은 덩어리 꼼틀거림을 시야에서 밀어 방치했고, 원룸을 도망치듯 나가 세상 화려함 속으로 뛰어들어 취하고 널브러져 자신을 학대하느라 정신없었어요.
한쪽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두 벌의 교복 명찰에는 철이와 민지 이름 석 자가 또렷했고, 나는 교복을 짊어지고 있는 옷걸이 속에서 세상을 잠시 스쳐 가는 생명이 엄마 아빠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떠나는 순간을 보았어요. 음식물 쓰레기와 술병이 나뒹구는 악취와 찌든 담배 냄새로 가득 찬 온기 없는 좁은 원룸에서 벌거벗은 생명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울음마저 뱉어낼 권리조차 없는 존재로 생명의 온기는 굳어갔어요.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견뎌내지 못하는 생명을 보면서 재활용이 될 때마다 살아남는 우리의 강인함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어요.
혜정과 인규는 같은 직장동료로 만났어요.
서로에게 마음은 끌렸지만, 오랜 기간 둘 다 탐색기를 가졌죠. 그 기간이 끝날 무렵 솔직한 대화의 시기를 거쳐 사랑을 시작했어요.
그들은 서로의 남자와 여자가 되고, 아내와 남편이 되었죠. 얼마 뒤 그들에게도 생명이 찾아왔고, 혜정은 잉태된 생명의 출산을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인규는 아빠 역할을 공부하고 연습하며, 준비된 아빠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생명을 기다렸죠. 혜정의 진통이 시작되고 인규의 간절함이 절정에 다다를 때 생명의 울음소리는 세상을 향해 우렁찼어요. 인규는 자기를 닮은 작은 생명을 품에 안았고, 자신을 의지하는 꼼틀거림에 가슴이 뛰고 경이로웠죠. 아이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씻기고, 우유와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처음 해 보는 아빠 역할에 두려움도 있었지만, 혜정의 조력이 있어 마음이 놓였어요.
첫 아이와의 만남으로 둘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지는 듯했고, 셋이 익숙해질 때쯤 둘은 두 번째 생명을 계획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생명이 잉태되어, 셋 모두 기쁜 마음으로 생명을 기다렸어요. 둘은 제법 엄마 아빠 노릇을 잘해 가는 것 같았어요. 둘째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둘은 경험 없이 만난 첫 아이 때와는 또 다른, 세상이 훤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은 행복감에 흠뻑 젖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은 둘째 아이 장애가 자신들 품에 있던 눈 부신 빛이 빛을 잃어 가는 것 같은 불안으로 혼란에 휩싸이고 말아요.
인규는 둘째 아이 장애 증상을 보면서 문득 옛 생각이 스쳤어요.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길거리 간식을 먹으며 장난치고 있을 때, 멀찍이 아버지 모습이 보였어요. 엄마가 아닌 다른 만삭의 여자와 산부인과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인규와 눈이 마주쳤지만, 여자와 택시에 올라 사라졌고 나중에 인규에게 말했어요.
“네가 어른이 되면 이해할 문제니, 엄마에게는 아무 말 마.”
고등학생 인규는 그 여자 뱃속 생명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저주했고, 얼마 뒤 정말 여자가 잉태하고 있던 생명은 죽어버렸죠.
인규는 그때 저주한 생명이 자기 아기에게 저주한 것은 아닐까? 아버지 외도의 책임을 무뚝뚝한 어머니 탓인 듯, 자기를 왜 낳았냐고 어머니에게 반항했던 자기에게 신이 벌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삼 떠 오르는 갖가지 기억들로 괴로워했어요. 혜정은 생명을 계획하고 잉태된 순간부터 자신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은 아닌지? 하지 말아야 할 언행을 한 것은 아닌지? 출산 과정 중 병원 실수가 있진 않았는지? 원인을 찾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전국 병원을 찾아다니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인규는 달라질 것 같지 않은 현실과 아빠의 역할을 버거워하며 벗어나고 싶어 했어요. 혜정은 그런 남편 모습에 절망했고, 의지할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엄마 역할을 과대하게 하고 있었죠. 그들은 매일 서로의 역할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충돌했고, 가여운 아기가 감당하고 있는 장애를 보살피지 못했어요. 결국 그들은 서로를 탓하고 원망하며 헤어지고 말았어요.
인규가 집을 나가는 날 큰아이 민지는 가방을 든 아빠 인규 손을 꼭 잡았지만, 인규는 그런 민지 작은 손을 뿌리치고 나가 버렸어요. 집을 나가 혼자 생활하면서 문득문득 자기를 붙잡았던 민지 작은 손이 떠 올라 괴로웠지만, 돌아갈 용기는 내지 못했어요. 인규는 회피해 버린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외면하듯, 돈 버는 일에 열중했죠. 인규는 혜정에게 넉넉한 생활비와 양육비를 꼬박꼬박 보내는 것으로 보상하는 것이라 여겼고, 모든 현실에 무감각해졌어요. 혼자 남겨진 혜정은 남편의 부재가 두 아이에게 결핍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지만, 혼자 맞서 살아 내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혜정은 아이들에게 절대 무심한 엄마는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다짐했죠. 하지만, 갑자기 남편의 경제적 지원도 소식도 끊어져, 남편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남편 행방을 알 수 없었어요. 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어요.
그날은 하얀 눈이 펑펑 왔어요. 혜정은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청소했어요. 민지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낮잠에 빠져든 두 아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첫째 민지는 생김새도 아빠와 판박이지만, 자는 모습과 습관 하나부터 열까지 아빠를 닮지 않은 것이 없었죠. 첫 아이 민지를 출산했을 때 인규는 자기 분신(分身) 같은 아기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어요. 아빠만 비대하게 닮은 첫째 민지에게 문득 서운함이 일었던 적도 있었지만, 혜정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지가 아빠를 닮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심하는 듯했어요.
혜정은 죽은 친정어머니를 떠 올렸어요. 오늘처럼 흰 눈이 내리는 날 학교 앞을 지나 집으로 가는 엄마 생선 손수레를 밀어주고 싶어 기다렸어요. 저녁 무렵 지나가는 엄마 손수레를 기다리며 창밖으로 눈 쌓인 길가가 보이는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한 남자 선생이 다가왔어요. 그는 혜정을 도서관 후미진 구석으로 데려가 혜정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추잡한 짓을 저질렀어요. 혜정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온몸이 굳어 버린 채 어둠이 내리는 그곳에 한참 머물렀어요. 그리고 학교 앞을 지나는 엄마 손수레를 보는 순간, 분노와 짜증이 뒤엉킨 감정으로 엄마에게 남자 선생이 괴물이었다고 울부짖었어요. 엄마는 그런 혜정에게 뭐 하느라 어두워질 때까지 집에 가지 않았냐며, 손수레나 제대로 밀라는 고함을 질러댔죠. 그런 엄마를 대신해 큰오빠는 선생을 찾아가 주먹을 휘둘렀고, 오빠는 퇴학까지 당하고 말았어요. 그런 어머니가 처참한 모습으로 커다란 가방에 구겨져 발견되던 날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어요. 어머니는 괴물의 먹잇감이 될 뻔한 어린 딸에게 왜 그리 무지한 고함만 쳐 댔는지...... 혜정은 그런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그리워 주체할 수 없는 눈물 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어요.
나는 베란다 창 속에 머물며 품에 작은 생명을 안고 베란다 난간을 붙잡고 서서 생각에 잠긴 혜정 뒷모습을 비추었고, 낮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아 베란다 난간에 서 있는 엄마 뒷모습을 오도카니 바라보는 첫째 아이 민지도 비추고 있었어요.
그들 사이에서 육신이 산산조각 부서지는 혜정 모습과 민지의 조각나 흩어지는 눈망울이 고스란히 내가 있는 창 속으로 담겼어요.
그날 혜정은 둘째 아이를 품에 안고 10층 아파트에서 투신하고 말았어요.
민지는 엄마가 사라진 난간만 바라볼 뿐 아무런 요동이 없었지만, 사이렌 소리와 현관문 뜯어지는 소리에 잠시 정신을 잃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신발을 신은 채 집안 곳곳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자국을 보며 공포에 휩싸여 아주 크게 울기 시작했죠.
민지는 할머니에게 보내졌고, 가끔 아빠는 함께 사는 아줌마와 찾아와서 용돈과 선물을 안겨 주었어요. 민지에게 엄마는 부서지고 흩어진 존재로 남았고, 그 조각의 일부가 되었을지 모를 그날이 정지되어 민지 내면을 휘젓고 다녔어요.
우리는 재활용이 될 때마다 어떤 모양과 역할인지 예상할 수 없고, 때로는 계획에 어긋난 모양으로 나올 때도 있어요. 가끔 잘못 나온 제품이 다른 개발품이 되기도 하고, 나오자마자 다시 재활용품으로 분리되기도 하지만, 의미 없이 불필요하게 버려지지는 않아요. 왜 혜정과 인규에게 둘째 아이의 장애가 그토록 엄마 아빠의 자리를 위태하게 했는지? 우리 같은 개발품도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누군가의 계획에 쓰일 때까지 그저 그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혜정’이라는 여자는 엄마의 이름도 스스로 버리고, 어린 생명의 생명마저 엄마라는 이름으로 판단하고 결정해 마음대로 하는 건가요? ‘여자’ 당신이 말하는 재구성된다는 순간이 이런 상황인가요?
잘 정돈된 집안과 전갈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명희는 아들과 대화 중이에요.
“엄마, 아빠는 왜 매일 바쁘기만 해요?”
“모든 아빠는 원래 그래”
“친구네 아빠는 자주 놀아 주고 숙제도 같이해 준대요.”
“그 아빠는 밖에서 할 일이 없나 보지.”
“그럼 아이와 놀아 주고 숙제를 함께 해 주는 일은 엄마 아빠 둘 중 누가 하는 일이에요?”
“공부는 학교 선생님에게 배우고, 숙제는 네 일이잖니, 밥 다 먹었으면 네 방에 가서 공부를 하든, 놀든 하렴. 엄마 옆에서 귀찮게 하지 말고.”
“내가 엄마 일을 도와주는 것도 안 되나요?”
“너는 학생이니 공부를 잘하는 것이 엄마를 돕는 거야”
명희는 부모님의 권유로 남편 덕수를 만나 가정을 일구었어요.
중매쟁이 주선으로 나간 다방에서의 첫 만남으로, 두 번째 대면하는 날이 결혼식장이었어요. 명희가 사는 시대는 옆집 영자도, 위 집 필순이도 그렇게 시집가서 사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때였어요.
결혼한 첫날부터 덕수는 물 한 잔도 직접 가져다 먹는 법이 없었어요. 집안이 조금만 어질러져 있거나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그는 명희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훈계하고 지시하며 억압적 언어와 행태로 명희를 길들이는 듯했어요. 그런 덕수 행동이 힘들었지만, 그런 것이 여자의 삶이라는 친정 부모님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 온 터라, 명희는 묵묵히 참아 내는 것이 아내의 역할이라 여기는 것 같았어요.
명희가 임신했을 때도, 그는 여자의 역할을 강요만 할 뿐, 남자의 배려가 필요한 시기임을 인식하지 않았죠. 임신으로 자기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명희에게 여자의 본분이 어쩌고 저쩌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주접을 떨어 댔죠. 명희는 그런 덕수로 인해 태중에 있던 첫 아이를 유산하고 어렵게 아들 인규를 출산했어요. 그렇게 아내의 자리에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인내했건만 덕수는 명희에게 만족하지 못했어요.
그날 아침도 덕수는 반찬 투정을 하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나가 버렸어요. 명희는 그런 덕수가 마음에 걸려 저녁 음식으로 덕수가 좋아하는 아귀찜을 하기 위해 먼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았어요. 사람들이 북적이고 웅성거리는 시장은 언제나 삶의 역동성이 넘쳐흘렀죠. 그 속에 들어가 이곳저곳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명희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다녔던 시골장 풍경이 그려져 문득 옛 생각이 스쳤어요. 시골 장에서 나물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돕고 있었던 남자아이는 멋진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 되었을 때도, 먼 거리를 오가는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어머니 노점상 정리하는 일을 잊지 않고 도왔어요. 명희는 그 남학생 얼굴을 보기 위해 아침마다 어머니에게 학교 끝나면 시장에 심부름 갈 일이 없냐 묻곤 했었죠. 명희 짝사랑을 알아차린 남학생은 명희에게 만남을 청했고, 명희는 머리모양, 옷매무새를 신경 쓰며 약속한 빵집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하지만, 웬일인지 남학생은 나오지 않았고, 그날 이후 나물을 파는 그의 어머니 노점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 남학생 얼굴은 희미해졌는데, 아직도 그를 떠 올리면 얼굴이 붉어지는 자신에게 당황스러워하고 있을 때, 먼 시야에서 덕수 모습이 선명해지고 있었어요. 덕수는 사무실 경리 아가씨와 함께 있었어요.
고운 화장을 하고 뾰족구두를 신은 경리 아가씨 팔은 덕수 허리를 감고 걸었고, 덕수 팔은 그녀 어깨를 감싸고 둘은 급히 어디로 가고 있었어요. 명희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 뒤를 따랐고, 그들이 들어가는 모텔 간판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털썩 앉아버렸어요. 행인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린 명희는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발길을 옮겼어요. 현관 앞 신발장 거울에 비치는 가꾸지 못한 자기 초라한 얼굴을 보며 경리 아가씨 젊고 고운 얼굴이 떠올랐어요. 명희는 덕수 외도를 모르는 것으로, 절대 덕수에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로 작심했어요.
덕수는 바깥일이 많다며 늦은 귀가와 외박이 잦아졌고, 명희는 그런 남편의 바깥 생활에 대해 깊이 알려하지 않았죠.
그런 생활이 길어지면서 명희 얼굴은 표정을 잃었고, 아들 인규에게도 건조하게 대하고 있었어요. 가끔 집에 들러 생활비를 주는 덕수는 언제나 당당했고, 명희 뚱한 무표정 얼굴을 나무라며 까닭 모를 생트집을 부리고 나가버리기가 일쑤였죠.
어느 때부터 경리 아가씨와 따로 살림집을 얻어 사는 것을 노골적으로 명희에게 들어내는 듯했지만, 명희는 그런 덕수 행태에 대해 무뎌지려 무척 애쓰는 것 같았어요. 나는 명희가 신혼 때 시장 가판대에서 덕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사 온 머리핀으로 찬장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것만큼 명희 기억에서 사라질 때까지 얌전히 있었어요. 인규는 사춘기에 접어들어서야 아빠, 덕수에게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엄마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머리핀을 발견하고, 아빠가 외도 상대에게 주려고 사서 숨겨 둔 것인 것 같아 나를 창밖으로 던져버렸어요.
우리는 배움이라는 것을 몰라요. 학습되어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를 흉내 내거나 따라 할 필요가 없죠. 환경과 상황 대상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존재라 할 수 있어요. 아내, 남편이라는 이름과 엄마, 아빠라는 이름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학습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