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오늘처럼 빗줄기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은석은 연주회 연습을 마치고 나오는 주희를 납치하다시피 차에 태우고 아무 말 없이 위태롭게 차를 몰았다.
“전도사님, 왜 이러세요.”
“……”
은석은 교회 행사장에서 주희를 처음 만났고, 한눈에 그녀가 자기 여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주희 주변에는 항시 그녀의 아버지가 같이 있어 다가갈 수 있는 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일하는 교회 담임 목사 심부름으로 주희가 활동하는 교향악단을 찾았을 때, 주희와 인사할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주희는 은석의 목표가 되었다.
주희는 대학교수인 아버지의 헌신적인 후원과 믿음으로 예중, 예고에서 클래식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해서 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대학원 공부를 마무리하면 유럽 국가로의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차갑고 도도한 인상으로 음악, 교회, 집 외에는 어떤 것에도 한눈을 팔지 않는 그녀의 절제된 일상을 두들기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주희는 자신이 계획한 목적지만을 바라볼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 주희 앞에 포기를 모르는 은석의 등장은 주희를 당혹스럽게 했고, 아버지 도움을 받아 피해 보려 했지만, 은석은 쉬이 주희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은석은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부모에게 자기 힘으로 대학까지 나온 위대한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이 아닌, 신학 대학원을 다니며 교회 전도사로 사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너무 똑똑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이상해져 종교에 빠져버린 안타까운 아들이었다.
“전도사님, 저는 누군가를 만날 마음이 없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하던 공부도 마무리해야 하고.... 제가 가야 할 길이 아직... 제발 차 좀 세워요.”
“주희 씨, 내가 주희 씨 가는 그 길 같이 갈게요. 내게 기회를 줘요. 내가 주희 씨 원하는 건 다 해 줄게요. 유학 준비한다고 했죠? 나와 결혼해 줘야. 결혼해서 내가 보내 줄게요. 아니 나와 같이 가요. 주희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은석 씨는 하나님 부름을 받은 종의 사명을 감당해야죠. 왜 저 같은 여자를 위해 살아요. 하나님 사역을 감당해야 할 분이 어째서 이렇게 어리석게 구는 거죠? 제발 어디든 차 좀 세워요. 이러다 사고 나겠어요.”
“주희 씨 우리 뭐든 함께해요. 제게 주어진 사역도, 주희 씨 꿈도 같이 이루어 가자고요. 내가 다 할 수 있어요. 주희 씨만 옆에 있다면 어떤 세상도 이겨낼 자신 있어요. 주희 씨 없는 미래가 떠 오르지 않아요.”
“일단 차 좀 세워요. 이러다 정말 사고 나겠어요. 제발 차 세우고 얘기해요.”
은석은 한적한 강변에 차를 세웠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와이퍼가 멈추자, 빗줄기가 차창을 덮어버렸다. 주희가 거친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와 갇혀버린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은석의 거친 입은 주희 입술을 삼키고 있었다. 주희는 거세게 은석을 밀쳐내고 차 문을 열려했지만, 차 문은 열리지 않았고, 은석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주희를 주춤하게 했다.
“주희 씨, 미안해요. 주희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요. 내게는 당신 부모님 같은 수준과 능력을 갖춘 부모도 없고, 당신처럼 부유함의 상징인 음악을 전공할 수 있는 환경에서도 자라지 못했어요. 그냥 내가 잘할 수 있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내가 잘 해내면 가난한 부모도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당신을 보고 깨져버렸어요. 그래서 당신을 포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부탁이에요.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요. 나 한 사람만 봐줘요. 자신 있어요. 주희 씨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자신 있어요.”
주희는 은석의 진심 어린 말과 눈물 앞에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물 속에 마음도 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남자로 보였고,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속 파장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은석의 입술이 다시 주희 입술을 터치하고 있었다.
“사모님,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은색 승용차 한 대가 쇼핑센터 처마 밑에 서서 멍한 생각에 잠긴 주희 앞에 섰고, 차 창문이 열렸다. 선희였다.
“네, 집사님, 둘째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들어가는 길인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좀 그치면 가려고요.”
“타세요.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 요.”
“아니에요. 집사님 괜찮아요.”
선희는 차에서 내려 작은 딸아이를 업고, 큰 딸아이 손을 잡은 주희를 뒤 자석으로 밀어 넣듯 태우고 차를 몰았다.
“집사님, 감사합니다.”
“저도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괜찮아요. 둘째가 많이 아픈가요?”
“감기 때문에 며칠 열이 안 떨어져서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요즘 열 감기가 유행인가 봐요.”
“네.”
주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창밖을 넋 놓고 바라볼 뿐 더는 말이 없었다. 작은 딸아이는 잠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볼그스레한 볼을 엄마 품에 묻었고, 첫째는 엄마 가라앉은 기분을 의식하고 선희와 엄마를 번갈아 보다, 어린아이의 수다를 단념한 듯 말이 없었다. 선희는 부목사 은석의 상황과 처지를 잘 알고 있기에 말 없는 주희 표정이 안쓰럽고 딱해 보일 뿐이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디 갔다, 와?”
“병원요.”
“왜”
“둘째가 열 감기가 심해서…”
주희는 은석과 어떤 말도 주고받고 싶지 않아, 하던 말을 멈추고 아이들을 욕실로 데려가 씻기고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애들은 다 아프면서 크는 거야. 버스 타고 왔어?”
“우연히 선희 집사님 만나서 태워주고 가셨어요.”
“선희 집사님 모시고 들어오지 차라도 한잔 대접하게… 나에 대해 별말 없었어? 교회에서 어떤 결정 내렸다는 말 없었어?”
“정말 당신,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요? 어떻게 우리 두 딸에게 이런 아빠가 된 거죠? 결혼할 때 당신 내게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어요? 그 약속 지킬 수 있다는 기대는 점점 사라졌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 믿었어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도 노력했어. 하지만, 인생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연애할 때야 무슨 약속을 못 해. 당신이야말로 고고하고 품위 있는 옛날 모습이 아닌, 애 둘 키우는 아줌마가 됐다는 걸 몰라? 언제까지 옛날이야기로 남편 기죽일 거야.”
“당신이 나로 인해서 기죽어 살았다고요? 그런 사람이 교회 자매와…”
“당신 정말 혜란이와 내가 불륜이라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이들 들어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죠. 당신이 어떤 범죄를 하였는지… 혜란이 이야기는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우리 어떻게 해요? 이 집 비워줘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요?”
“한국 아버님에게 일단 생활비라도 좀 보내 달라고 해 봐.”
“우리 아버지가 무슨 돈이 있어 매번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럼 나 더러 어쩌라는 거야?”
“당신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어 버린 거죠.”
주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며 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희는 언제나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겉모습보다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녀를 더욱 반짝이도록 가꾸어 주고 있는 것 같았었다.
그녀 부모는 맏딸에게 한없는 신뢰와 믿음으로 후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녀를 귀하고 고귀한 존재로 대하는 것처럼 그녀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사랑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녀 옆에 있으면 은석, 자신도 그녀처럼 가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주희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맏딸의 선택을 믿고, 장인, 장모는 결국 은석을 받아들여 주었다. 결혼에 성공하면서 한동안은 은석의 예상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장인 장모는 결혼을 허락하는 순간부터 은석을 섬겨야 하는 목사로 예우했고,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았었다. 은석은 달라진 환경 속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누리고 있던 것인 것처럼 당당해지고 있었다.
첫딸을 출산하고 둘째를 임신한 주희에게 은석은 자기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겠다고 했다.
“무슨 돈으로 유학 가겠다는 말이에요?”
“요즘 대형교회 목사 중에 유학파 아닌 목사들이 없어? 나도 삼 년 정도만 갔다 오면 지금 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무슨 돈으로 유학 가겠다는 거냐고요?”
“아버님에게 이야기 좀 꺼내 봐. 옛날에 당신 유학 보내려고 장인어른 계획하고 계셨잖아.”
“그 돈 우리 결혼하면서 신혼집하고 신혼살림 내주셨잖아요. 지금까지 당신이 교회에서 받아 오는 월급으로는 우리 생활비도 안 돼서, 번번이 친정에서 도움받고 있다는 거 알면서 그런 말을 해요? 나 유학 보내 준다고 당신이 약속했잖아요. 언제 보내 줄 거예요?”
“그럼, 당신 유학 간다고 해, 내가 애들 보면서 영어 공부 좀 하게.”
주희가 둘째 딸을 출산하고 일하기 시작하면서 은석의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장인 장모의 기대 어린 눈빛도 없어졌고, 목회자인 은석을 신뢰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는 교회 사람들이 늘어났다. 은석은 근무하던 교회를 그만두고 해외에 있는 이민자들이 모이는 한인교회에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이민 목회를 계획한다는 핑계로 두 딸은 장모님에게 맡기고 외국인들이 모이는 교회 자원 봉사자로 일하며 보낸 지 두 해가 지날 때쯤 호주 멜버른에 있는 ‘S’ 교회에서 연락이 왔었다.
주희가 하는 일을 그만두게 했고, 집 전세금을 빼고, 모든 집기를 팔아 정리했다. 주변 지인들에게 해외 이민자들이 설립한 교회에 초청받았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멜버른으로 들어왔었다. 주희는 다른 환경과 상황으로의 도전을 말하는 남편 독립을 지지했고, 은석의 용기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으로 따라온 현실에서 더는 남편에게 어떤 신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었다.
‘S’ 교회에서 초청 비자를 내 준 것이 아니라, 은석이 집 전세금을 학비로 내고 개인적으로 받은 어학코스 비자였고, 교회 권사님께서 자녀 미래를 위해 마련해서 비워 놓은 집을 저렴한 렌트비로 내어 주어 잠시 머물 수 있었다. 은석은 일 년여 간의 어학코스가 끝나기 전에 교회에서 종교 비자를 받을 계획이었지만, 지극히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은석은 학업과 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주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피아노 래슨으로 일부의 생활비를 벌어 보태며 은석의 선택을 지켜볼 뿐이었다. 혜란은 그런 은석과 주희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서 어리지만, 목회자 가정을 잘 섬기려는 속 깊은 교회 청년으로 보였었다. 그런 혜란의 태도가 어느 순간부터 주희에게만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지만, 의과대학을 다니는 혜란이 공부에 스트레스가 많아 그러려니 넘겼었다. 어느 날 주희는 은석에게 두 딸을 맡기고 방문 래슨을 위해 외출했고, 마지막 래슨이 취소되어 예상보다 빠른 귀가를 했다. 대문 앞에서 놀고 있는 두 딸이 엄마를 보고 뛰어와서 말했다.
“아빠가 혜란 이모와 할 말 있다고 나가서 놀랐어요.”
주희는 가슴에서 커다란 천둥소리가 만들어지는 듯, 불안이 밀려들었다. 그때 은석과 혜란이 같이 나왔다.
“어, 당신 일찍 왔네? 혜란아 교회에서 보자.”
은석은 당황한 낯빛으로 주희를 맞았고, 혜란은 주희와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주차된 자기 차로 가 인사 없이 가 버렸다.
“혜란이가 신앙에 대한 고민이 많은가 봐, 공부도 힘들고, 유학 생활도 지치고…”
은석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주희 눈치를 보았고, 주희는 그런 남편 모습보다, 두 딸의 맑은 눈망울에 가슴속 천둥소리는 더 크게 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