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상실의 숲 07화

7. 뿌리 없는 지지대

by 조은이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며칠 내렸지만,

오늘은 못내 아쉬워 다시 돌아온 가을 햇살의 청명함이, 촉촉한 세상 위에 반짝반짝 가을 색을 뽐내고 있었다.


콘과 로라는 오랜만에 마당 곳곳에 있는 나무들의 겨울나기 준비에 분주했다.

사계절을 견디는 레몬 나무 아래 떨어져 섞고 있는 레몬을 치워주고, 체리 나무는 겨울을 잘 버틸 수 있도록 가지치기와 온도를 위해 비료 포대로 감싸 주었다. 더는 기다릴 손님이 없는 듯, 힘 매가리 없이 가늘게 몇 개의 초라한 꽃을 달고 있는 동백나무 아래 붉은빛을 잃은 동백꽃들은 콘의 비질에 쓸려 없어져 버린다. 울타리를 대신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는 가냘픈 갖가지 꽃나무들이 콘과 로라의 손길을 거쳐 자기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뿌리 없는 막대기 지지대에 기대어 겨울 쉼을 준비하고 있었다.


“Hello, 혹시 이 집에 한국인 서인숙 씨가 살고 있나요?”

선희는 인숙에게 근처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할 생각으로 무작정 인숙이 사는 주소지를 찾아왔다. 정원 정리를 하는 백인 노부부 모습을 보고 영어에 대한 부담감으로 잠시 망설였지만, 인숙을 만나야 한다는 마음속 요동 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Hello, nice to meet you. 인숙 우리 집에 살고 있어요. 친구인가요?”

로라가 선희 차가 주차되는 것을 보고 허리를 펴며 일어서 잠시 선희를 기다리다, 다가온 선희 물음에 대꾸했다.

“저는 ‘S’ 교회에 다니는 주선희라고 합니다. 한국 마트에 인숙 씨 연락처를 남겨 두고 가신 적이 있으시죠?”

“아~ 맞아요. 나와 같이 한국 마트에 갔을 때, 한국교회를 소개받은 적이 있어요.”

몇 발짝 뒤에서 선희 말을 듣고 있던 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오며 말했다.

“인숙 씨 집에 있나요?”

“아니요, 오늘 인숙은 시내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전시회 간다고 나갔어요. 시간이 괜찮으면 우리 집에 들어가서 커피 한잔하고 가시겠어요?”

로라는 장갑을 벗어 흙먼지를 털어 내며 선희에게 같이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일하고 계시는데, 실례를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아요, 우리도 티타임을 가질 시간이거든요. 같이 들어가서 커피 즐깁시다.”

콘이 로라를 거들었다.


집 안의 모든 것들은 오래되어 보였다.

늙은 가죽 소파는 로라의 돌봄을 잘 받아 고상하고 점잖아 보이는 윤기를 머금었고, 크고 작은 원목 가구들은 작고 큰 흠집마저도 익숙한 자기 것으로, 세월의 흔적으로 받아들인 자연스러움이 집안 분위기를 한층 더 편안하게 하는 것 같았다. 벽마다 붙어 있는 크기도 재질도 다른 액자 속에는 콘과 로라 삶의 토막들이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거실 구석 한쪽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십자가와 성경책이 모셔져 있었다.


“당신들도 크리스천인가 봐요?”

“네 우리도 하나님 자녀입니다. 선희,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겠어요.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랍니다. 드셔 보세요. 인숙도 집에 있는 날은 우리와 티타임을 함께 할 때마다 이 커피를 즐긴답니다.”

작은 잔에 담긴 커피는 짙은 색깔만큼이나 강한 향이 올라왔다. 선희가 커피를 조금 삼키고 로라가 만든 쿠키를 한입 가득 물고 있을 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인숙이 들어와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맘, 아직 티타임 끝나지 않았죠? 커피가 생각나서 트램에서 내려 걸음을 재촉했어요.”

“오~ 물론이지, 우리도 지금 막 시작했어, 앉으렴, 커피 준비해 줄게. 그리고 네 손님이 오셨단다.”

로라는 급히 주방으로 갔고, 콘은 인숙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인숙을 선희 가까운 자리로 이끌어 앉혔다. 인숙은 선희를 보는 순간 전화 통화를 했던 교회 아줌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전화했던 주선희라고 합니다. 지나는 길에 혹시나 해서 잠시 들렀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친절하게도 커피까지 대접하시네요.”

“아 네, 우리 집 어른들 사랑이 많으셔서…”

인숙은 조금 무심하게 선희를 대하고 있었고, 로라가 커피와 쿠키를 더 내오고 자리에 앉았다.


“로라, 당신들은 언제 하나님을 영접하셨어요?”

선희는 냉랭한 인숙의 반응을 피하듯 콘과 로라에게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건넸다.

“우리는 둘 다 모태신앙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섬겼어요. 행운이었죠. 콘과 나는 교회에서 만나서 결혼했다오. 부족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한없이 채워주셨고, 넘치도록 주셨답니다. 선희는 언제부터 하나님 자녀가 되었나요?”

“네, 저는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늘 배가 고팠어요. 어느 날 교회에서 먹거리를 나눠 준다고 해서 동네 친구를 따라갔는데, 먹을 것도 주고 선물까지 주더라고요. 그다음부터는 교회에 뭘 얻으려고 가기 시작했어요.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고, 저도 교회에서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어요. 인숙 씨도 저와 같이 교회에 한 번 가 보지 않겠어요?”

인숙은 창밖을 응시하고 커피 향을 들이켜고 있었지만, 선희가 가난해서 배가 고팠다는 대목부터 귀는 선희 목소리에 이끌려 있었다. 하지만, 선희 말끝 물음에 다시 귀는 닫혀버렸고,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다른 손의 도움을 받아 조금 잘라 입속으로 넣으며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선희 물음에 인숙 대답이 늦자 콘과 로라가 선희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래 인숙, 지난번 한국 마트에서도 내가 말했지만, 교회 가서 한국 친구들을 좀 사귀어 보면 어떨까?” 콘은 인숙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인숙, 하나님께서 인숙을 우리 집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요즘 우리는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단다.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교회 나가는 것은 네 마음이 열릴 때 가도록 하렴. 하지만, 하나님은 너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 같구나. 이렇게 선희 같은 친구를 보내신 것을 보니…” 로라는 반응 없는 인숙 어깨를 감싸고 힘주어 안고 웃으며 말했다.


“인숙 씨, 무슨 전시회 다녀왔어요?”

선희가 물었다.

“피카소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혹시 그림 전공하셨어요?”

“네.”

“정말이에요?”

선희는 알 수 없이 들뜬 표정으로 얼굴 가득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띠고, 다시 물었다.

“정말 그림 전공했어요?”

“네, 미술학원에서 입시생들 가르쳤어요.”

인숙은 선희 달라진 표정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혹시 괜찮으면 우리 집 가서 저녁 먹지 않을래요? 저도 그림 그리거든요. 제 그림 좀 봐주시겠어요?”

“저는 예술을 하는 작가 같은 사람이 아니고요. 그냥 대학입시 준비하는 학생들, 수학 공식을 알려 주듯 그림 공식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일 뿐이에요 ”

“인숙 씨, 부탁이에요. 저는 한 번도 어디서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혼자 그리고 있어요.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했어요. 그림 가르쳐 줄 수 있는 친구를 부쳐 달라고요. 인숙 씨는 하나님 응답인 것 같아요. 한 번만 봐주세요. 부탁이에요.”


인숙은 하나님이니, 기도의 응답이니, 맹신도 같은 말을 서슴지 않는 선희가 불편하고 짜증스러웠다.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정신 나간 아줌마인 것 같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로라는 음식을 사줄 테니 같이 가서 놀다 오라고 했고, 콘은 저녁에 데리러 가겠다고 선희 집 주소를 받아 적으며 인숙을 떠밀고 있었다. 인숙은 그림을 생계나 삶의 수단이 아닌, 그냥 좋아서... 다시는 자기를 찾아오지 못하게 할 혹평을 하고 올 작정으로 선희 차에 올랐다. 선희는 콘과 로라에게 저녁 식사를 하고 적당한 시간에 자기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인숙을 데리고 갔다.




갈대가 빼곡히 우거진 들판과 만나는 하늘은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고, 소나무 한 그루가 엉거주춤 허리를 펴지도 기댈 곳을 찾지도 못하는, 똑같은 미소를 띠고 있는 사람들 얼굴은 다양한 가발을 쓰고 있는 전시용 마네킹 같았다. 꽃과 가지는 제 짝을 찾지 못한 듯 엉성하게 서로에게 붙어 있고, 잔잔한 바다는 오래된 어항 속에 갇혀 칙칙한, 계절을 알 수 없는 자연 풍경은 오랜 시간 붓놀림을 멈춰버린 미완성으로 먼지와 함께 퇴색되어 가고 있었다.

“인숙 씨, 내 그림 어때요?”

수줍은 미소를 띠고 선희는 자기 그림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숨기지 못하고, 인숙에게 자기 노력을 자랑하듯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네 잘 그리셨네요.”

인숙은 선희 표정에 장단 맞춰 주었다.

“정말이에요? 사진 보고 혼자 그린 건데, 그냥 하는 말 아니죠?”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이 정도 했다는 건 참 대단한 거예요.”

“그냥 좋게 봐주시는 거 아니에요?”

“개체 하나하나 묘사를 참 잘하셨어요.”


인숙은 선생 노릇을 하기보다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묘사해 둔 선희 노력을 알아주고 싶었다. 하나하나 묘사만 잘 된 개체들이 꽉 차 있어 그림은 숨구멍이 없어 답답했고, 잘 그려 보이긴 하지만, 자연스러움을 인위적으로 왜곡하려는 억지가 보이는, 연습장을 채워가야 하는 빡빡이 숙제를 열심히 해 온 노트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인숙 씨 그래도 전문가의 시선으로 한두 가지만 좀 지적해 주면 안 될까요?”

“무조건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리지 마시고, 좀 막연하더라도 사진이 아닌 실물을 보고 느껴지는 대로 그리는 것이 더 도움이 됩니다. 사진을 보고 그릴 때는 사진에서 보이는 것을 보면서 자기에게 느껴지는 감정을 찾고 떠 올려보는 것도 좋아요. 보이는 갈대를 묘사하기보다 바람을 타고 있는 갈대를 상상해 보고, 사람 얼굴을 그릴 때는 그 사람 얼굴에 드리워진 삶을 관찰해 보는 것도 좋고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는 가까운 바다를 보지 말고 멀리 있는 바다를, 풍경 속 자신이 어디에 머물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죠.”


선희는 인숙의 말을 칭찬으로 듣는 듯,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기가 보고 그린 사진들을 찾아와 그림과 똑같지 않냐며 되물었다.

“네, 사진 보니까 똑같이 그리셨네요.”

인숙은 그냥 선희가 원하는 대답을 주는 것이 덜 피곤할 것 같았다.

“인숙 씨, 정말 고마워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봐요. 음식은 못 하지만 해 줄게요.”

선희가 자기 성취감에 취해 인숙 몇 마디에 들뜬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고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름이 왔어.”

딸 아름의 등장으로 선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있었다.

“안녕”

인숙은 선희 언행에 적응하기 어려운 듯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려 아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아름입니다.”

“우리 딸이에요.”

“키도 크고 참 예쁘네요.”

“우리 아름이도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요. 아름아 이 언니 한국에서 오셨는데, 그림 전공해서 학생들 가르치셨대. 이 언니가 엄마 그림 잘 그렸다고 했어.”

“교회 집사님들도 엄마 그림 잘 그린다고 했잖아.”

“이 언니는 전문가잖아.”

“아무튼, 엄마 기도가 이루어졌네?”

“안 그래도 인숙 언니에게 그렇게 말했어.”

“왜 하나님은 엄마 기도만 들어주시는 거야? 내 기도는 언제쯤 들어주실까?”

“네가 엄마처럼 열심히 안 하잖아. 식사 기도도 네가 좋아하는 반찬 앞에서는 잊어버릴 때가 더 많잖아?”

“알았어! 나도 오늘부터 엄마처럼 꼭 잊지 말고 기도 열심히 해야지. 언니, 우리 집에 자주 오세요.”


인숙은 모녀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저런 식으로 대화하는 건가? 내가 왜 여기 왔을까…
인숙은 학원에서 학부모들을 상담할 때처럼 가식적인 표정으로 무장하고 선희와 아름을 대하고 있었지만, 번뜩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녁은 집에 가서 먹을게요.”

“무슨 말이에요. 저녁 먹고 차도 마시고 가요.”

“언니, 저는 이제 왔는데, 벌써 가신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저 귀찮게 안 할게요. 엄마랑 더 노시다 가세요”

선희가 집까지 태워주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혼자 찾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선희 표정은 어떤 것이 상대에 대한 배려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인숙은 오늘만 견뎌 보기로 했다.


“아름이 아버지께서는 안 오세요?”

“네, 아름 아빠는 한국에 있어요.”

선희와 인숙은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우리는 아직 영주권을 기다리고 있어서 영주권이 나오면 아름 아빠가 회사 사표 내고 들어올 거예요. 아름이랑 둘만 있으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시간 나면 오세요.”

“근대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인숙은 대학 선 후배 관계나 직장 동료들 외의 다른 어떤 관계에 얽혀 본 일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 이런 관계에서 선희와 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호칭이 적당한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제가 집사라고 불리지만, 교회 안 가봐서 그런 말이 좀 그렇죠? 인숙 씨 보다 내가 위니까 편하게 선희 언니라고 불러요.”

“언니라는 호칭은 좀 더 가까운 사이끼리 하는 거 아닌가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그럼 앞으로 더 가까워지면 되겠네요.”

“아, 네….”


선희의 파스타는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짠맛, 단맛, 매운맛…. 싱겁다고 하기에는 딱히 무엇으로 간을 맞춰야 하는지 모르는….

인숙은 친언니가 떠 올랐다. 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끓여준 최악의 라면은 인숙이 언니 몰래 라면 국물에 된장을 조금 풀고 나서야 겨우 먹을 만했었다. 인숙이 기억하는 언니는 독립된 개체 같았었다. 항상 혼자 있으려고 했고, 누군가 말을 시키면 무표정한 얼굴을 보여주면 알았다는 말이고, 아무 반응이 없으면 싫은 것이다. 엄마 아버지가 두들기고 부수며 격한 싸움을 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언니가 집 나가기 전 동생과 인숙에게 라면 두 개를 끓여주었었다. 그날 이후 세월이 흘러 연락이 닿은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만난 형부와 딸 둘을 낳아 키우며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아름은 자연스럽게 치즈 가루와 케첩, 소금과 후추를 가지고 와서 적당량을 뿌려 섞어 먹었고, 인숙은 친언니를 떠 올리며 파스타 가닥을 그냥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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