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요함이 집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 이 집만이 덩그러니 있을 것 같은...
어둠 속에 묻힌 집 안에 갇혀 인숙은 깊은 고립감을 직면하고 있었다. 낡은 책상 위에는 호주 달러 뭉치 전 재산과 돌아가는 비행 스케줄 용지와 여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숙은 어느 날부터 자기 일상에서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순간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왜 그 장소에 와 있는지를 잊어버렸고, 학원 원장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서 잠깐 그가 누구인지 몰라 당황했다. 집을 찾지 못해 헤매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결국 병원을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고, 신경 정신과에서 검사 결과를 듣고 있었다.
“서인숙 씨는 지금 해리성 기억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해리성 기억장애라니요?”
“해리성 기억장애는, 특별한 뇌 기능의 문제없이 외부적인 충격 외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적, 심리적인 원인으로 부분적, 일시적으로 기억이 해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느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기억을 삭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크게 선택적, 체계적 두 가지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요. 서인숙 씨 같은 경우는 선택적 해리성 기억장애라고 판단이 됩니다만, 아직은 일시적인 기억장애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 심각한 건망증을 전문 용어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건망증과 해리성 기억장애는 차이가 있습니다. 심한 건망증은 스트레스나 호르몬 변화, 노화, 피로, 개인의 질병 등으로 뇌 기억 중추인 해마에 있는 특정 단백질 부족이 원인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해리성 기억장애는 심리적인 문제로 봐야 합니다.”
“네…”
인숙은 심리적인 문제라는 의사 말에 숙연해졌다.
인숙의 일상은 숨을 쉬고 있기에 주어진 상황을 살아내고 있었을 뿐, 문득문득 세상을 피해 숨어버리고 싶다는 충동과 어느 날 자신이 흔적 없이 소멸해 버리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인숙은 가슴속 휭 한 먹먹함으로 절망의 어둠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입술은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었다.
“해리성 기억장애는 특별한 치료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심리적인 원인으로 발생하는 만큼 무엇보다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장애로 인해 우울증이나 불안증세가 동반될 때 항울 제나 항불안제를 처방합니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 요소가 해소되거나, 어떤 계기로 일상에 여유를 찾으면 괜찮아지기도 합니다.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는 의사와 꾸준한 상담을 통해 자신을 심리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원인을 찾고, 객관적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숙은 처음 병원을 찾아갈 때만 해도 우울증과 불안증 같은 증상은 없다고 여겼었다. 어떤 희망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현실도 아니었고, 현재 상황이 대학 입학을 할 때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은 더욱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온 자신에게 결과보다 과정을 기억하라 최면을 걸어가며 잘 견디고 있다, 생각했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별문제 아니려니 했지만, 인숙의 이성적 생각과는 달리 아무리 정신 무장을 해도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견디고 홀로 세상을 헤쳐 나온 현재의 결과에 대한 깊은 좌절감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공포와 허탈감은 오랜 기간 인숙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불안과 우울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정체 모를 어둠에 잠겨 들고 있었다.
몇 번의 심리 치료와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고, 의사는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말도 해 주었다. 하지만, 엄마 장례를 치르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떠 올리지도 않았고, 언니가 사는 집 주소조차 동생들에게 말하지 않고, 엄마 장례식에서 만난 형부가 동생들 연락처를 묻는 것조차 예민하게 차단했던 언니는 아주 멀리 있는 존재 같았다. 남자 친구와 원룸에서 동거를 시작한 동생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 긴 했지만, 인숙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비와 약값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치료받아야 하는 이유조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인숙은 지독하게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우울의 덩어리들을 떼어내고 싶은 조급함으로 핸드폰에 저장된 수십 개의 전화번호를 훑었고, 자신이 갇혀 있는 구덩이 속 두려움을 외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대학 동창들을 만나 비싼 커피를 마시며 잊은 기억을 점검하듯 옛 생각을 끌어올려 수다를 떨었고, 새벽녘까지 동대문 아이쇼핑을 다녔다. 예전 동료들을 만나 날이 새도록 술을 퍼마시며 주정에 가까운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인숙의 고독은 사람들 속에 있을 때 더 짙고 깊어져 아래로 아래로 꺼져 내려가는 것 같았었다. 인숙은 알 수 없는 목마름으로 사막에서 길을 잃고 오아시스 신기루를 좇고 있는 것 같은 날들을 멈추지 못하고 또 누군가의 전화번호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어, 인숙아”
“기완아, 시간 되니?”
“왜? 무슨 일 있어?”
“그냥 나 좀 만나줄 수 있어?”
“어디서 볼까?”
“우리 자주 가던 만화방에서 볼까?”
“그래.”
기완은 인숙과 이년 여간 사귄 연인이었지만, 인숙 엄마 장례 이후 그냥 멀어져 가끔 만나는 친구가 되었다. 만화방에서 둘은 라면을 먹고,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커피를 들고 구석 자리 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나란히 등을 붙이고 앉았다.
“웬일이냐?”
“기완아”
“왜 그래? 네가 내 이름 목소리 깔고 부르니까 불안한데...”
기완은 평범함의 아이콘 같은 소심한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씩씩하고 대범한 인숙을 사랑했었다. 하지만, 인숙이 살아온 삶을 알게 되면서 인숙은 자기보다 멋지고 능력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 보상받는 삶을 살길 바라며 인숙에게서 멀어졌었다.
“기완아, 나 살기 싫다.”
인숙은 깊은 구덩이 속에서 소리 지르는 것을 포기한 듯 무심하게 말을 뱉고 있었다.
“참나, 천하에 서인숙이 살기가 싫다고? 옛날에 우리 아버지 때문에 내가 살기 싫다고 했을 때 생각난다.”
기완은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부모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로 마음을 잡지 못했고, 부모님 몰래 연수원을 때려치웠었다. 그리고, 수능을 다시 보고, 다른 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다니면서 인터넷 게임 잡지사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다. 사춘기도 없었던 순응적이고 성실했던 아들의 늦게 찾아온 항거에 기완의 아버지는 기완을 쫓아내고 말았었다. 그때 기완은 못 먹는 술에 취해 인숙에게 살기 싫다는 주정을 부리곤 했었다.
“기완아, 내가 그때 너한테 뭐라고 해 줬니?”
“술주정하지 말라고 했어. 너는 지금 라면 한 그릇 먹고 취하지도 않았는데, 웬 주정이냐? 인숙아, 나는 네가 내 친구지만, 네가 살아온 이야기 토막토막 듣고 정말 너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너 같은 환경과 상황에서 살았으면 너 같은 모습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왜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
인숙은 커피가 없는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릴 뿐, 말이 없었다.
“인숙아, 무슨 일이야?”
인숙은 책장에 촘촘히 나열되어 글자가 난립한 책 등을 응시하고 입술만 달그락거렸고, 인숙 얘기를 듣고 있는 기완은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내려놓은 종이컵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둘이 오랜만이야!”
만화방 주인의 걸걸한 목소리에 인숙과 기완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눈치 없이 말을 걸었나? 미안해 둘이 한참 동안 안 오길래 궁금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분위기 파악을 못 했네, 미안미안 방해 안 할 테니 계속 이야기들 해.”
“아니에요.”
인숙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 커피 한 잔씩 더 줄까?”
“형, 커피 말고 맛있는 거 좀 없어요?”
기완이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나가며 말했고, 얼마 뒤 기완은 소시지 몇 개와 과자 한 봉지, 물 한 통을 가지고 와서 앉았다.
“인숙아 심리 치료 꾸준히 받고, 한동안 집에서 쉬면서 너 하고 싶은 대로 막 하다 보면 좋아지지 않을까?”
기완은 언제나 무난하고 평범한 언어로 인숙을 대했었다.
험한 그늘진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해 어렵고 힘든 형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줄 모르는 기완이 철없는 어른 같아 보일 때도 많았지만, 자기 생각을 강요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기완에게 인숙 자신의 어두웠던 환경을 말하는 것은 기대도 실망도 없는 편안함이었다.
기완과 인숙은 어둑어둑해지는 저녁거리를 걸었고, 기완은 자기 전 재산을 현금으로 인출해서 인숙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인숙이 네가 나중에 더 성공할 것 같다, 이 돈 그때 갚아라.”
“야, 웃겨. 옛날에 집에서 쫓겨나서 우리 집에서 뒹굴다, 고시원으로 나갈 때 나한테 빌려 간 돈 잊어버렸냐? 너 아직 집에 못 들어갔잖아. 됐어, 너 써”
“나는 그래도 아버지 몰래 엄마가 고시원으로 반찬도 가져다주고 용돈도 좀 주고 가셔, 알바도 하잖아. 상황 봐서 집에 들어가야지. 내가 우리 집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최악의 경우 비빌 언덕이라도 있잖아.”
기완은 인숙 주머니에 현금 뭉치를 쑤셔 넣고, 이십 미터쯤 떨어진 노점상으로 뛰어가서 붕어빵 두 봉지를 가슴에 품고 돌아와 인숙에게 붕어빵 한 봉지를 안기고 돌아갔다.
인숙은 더는 이렇게 지질하게 질질 세상에 끌려가듯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병원 상담도 치료도 멈췄고, 처방받은 약도 먹지 않았다.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버티는 인숙이, 더는 살아낼 자신 없는 진짜 인숙을 벼랑 끝으로 밀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이제 세상을 그만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오면서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는 것처럼 마음의 평온을 찾았었다. 낯선 곳에서 남아 있는 돈을 다 쓰고 나면 돌아갈 것이었다.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흔적 같은 것은 남기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스스로가 정해 놓은 시간 동안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마지막 여행지로 멜버른이라는 도시를 선택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