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4일을 호되게 앓고, 5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회복을 했다.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주말이 되었는데, 내가 맥을 못 추고 소파에 모로 누워 환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게 미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목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열은 심하게 오르지 않았지만 몸살 증세가 심했다. 최악이었던 것은 양쪽 턱선에서부터 시작해 관자놀이와 정수리와 미간을 감싸 안으며 몰아치는 두통이었는데, 원래 이가 약한 나는 두통과 함께 찾아오는 잇몸통과 치통을 견디기가 힘들다.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났는데, 오늘은 몸이 한결 가벼운 느낌이 든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고, 텅 빈 냉장고를 뒤지다 딱 하나 남은 요거트 한 통을 꺼내 보울에 담아낸다. 이번에는 찬장을 뒤질 차례. 플라스틱 통 밑바닥에 한 줌 남은 그래놀라도 발견한다. 견과류를 조금 더하고 그 위에 꿀을 잔뜩 뿌린다. 아차, 부엌 정리를 하며 몇 달 지난 커피콩을 다 버렸는데, 오늘 커피는 글렀나 싶었다가 결국 정확하게 한 번 내릴 분량의 남은 커피 가루를 발견했다. 이걸로 나름 푸짐한 아침상이 완성된다.
기운이 빠질 때 하루를 시작하기 좋은 노래는 Joao Gilberto의 'S Wonderful이라는 곡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Eat, Pray, Love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여러 번 돌려보다가 이 노래에도 빠지고 말았다. 창문에서 가장 가까운 의자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데, 새소리가 들린다. 이 노래에 새소리 효과음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하고 뒤를 돌아보니 종종 우리 집 발코니에 찾아오는 작은 새다. 내가 움직이거나 가까이 다가가면 금세 날아가버리는 녀석이라 나는 그대로 정지한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도심 곳곳에 녹지가 잘 보존되어 있고 그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이 집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발코니에 화분을 잔뜩 사들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매일 찾아오는 새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둘기, 마이나, 그리고 내가 가장 예뻐하는 이 올리브백 선버드. 워낙 빠르게 움직여서 우리 집 발코니에서는 사진을 찍을 새가 없었는데 어느 날 공원에서 같은 종류의 새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찾아보니 그런 이름이었다. Sunbird, 라니 너무 예쁜 이름이 아닌가.
이 녀석이 우리 집에 찾아오는 가장 큰 이유는 발코니에 거의 항상 피어있는 분홍색 꽃의 꿀을 먹기 위해서다. 조금 오래 머무르는 날이면 찌찌찌, 찌르르- 하는 식의 노래를 부르는데, 친구를 부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노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건지 알 길은 없다. 오늘은 유난히 오래 (라고 해봤자 고작 2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머무르며 길게 노래를 들려준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낮게 질베트로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고, 등 뒤로 햇살이 따끈하게 내리쬐고, 작고 아름다운 새가 내 바로 앞에서 지저귀고 있다. 오랜만에 아프지 않고 가뿐한 몸 안으로 행복감이 차오르는 것을 가만히 느껴본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월요일 아침의 일상에, 올리브백 선버드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고서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여기 싱가포르의 어느 집 안에, 내 마음에 쏙 드는 동그란 식탁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다는 것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마흔이 되어 간다는 것도, 이혼을 한 것도, 첫째가 어느새 열다섯이 되어버린 것도, 이번주에 있을 회사의 구조조정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두 비현실적이다. 지금 나의 이 현실 안에, 비현실적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중 어느 하나도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새소리를 들으며 난데없이 번뜩 깨닫게 된다. 새소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그게 새소리였을 따름.
이런 작은 순간들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기록으로 남겨보기로 한다.
이 글을 읽는 분에게도 올리브백 선버드의 노랫소리 같은 순간이 다가가기를 기원하며.
(표지 사진은 무료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찾은 것. 우리 집에 오는 아이가 딱 저렇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