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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우 Apr 15. 2023

흐트러짐의 묘미

주말 아침은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지만, 일부러 침대를 정리하지 않는다. 매일 하얗고 반듯하게 주름을 편 침대로 돌아오는 것이 나에게는 소중한 일상의 호사 중 하나지만, 어째서인지 주말 아침은 자다 일어난 침대를 유지하는 것에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 일주일에 하루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는 게 이런 느낌이려나, 문득 공감대를 찾아본다.


구조조정 발표가 난 게 3월 15일이었으니, 오늘로 정확하게 한 달이다. 어째서인지, 랄까 당연하게도, 랄까 분명히 무직자가 되었는데 그전보다 더 바빠졌다. 무직자가 되었는데 어째서,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동시에 구직자가 되었으니,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구조조정 관련 소문이 무성해서 마음이 불안하던 무렵에는 회사에서 잘리면 여행을 가거나 하루종일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책을 읽다가 꾸벅꾸벅 졸거나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세 시간씩 요가를 다녀와야지, 하는 식으로 자기 위안을 했다. 정작 구조조정 이메일을 받고 나서는 매달 집세와 아이들 학비를 내야 하는 외국인의 신분이 더 가깝게 다가왔다.


책상을 정리하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인터뷰 스케줄을 조정하고, 매일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는 와중에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 버튼을 누르고, 널어둔 빨래를 개고, 화분에 물을 준다. 가끔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이틀째 물을 한 컵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 굳이 물어봐줘서 깨닫기도 하지만, 일단 밖에서 만날 약속이 더 많으니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것에 안도한다. 캘린더를 이렇게 꽉 채워서 지내는 것도,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적당히 웃는 낯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한 시간씩 질문에 답하는 것과 '언제 한번 만나자'는 예전 동료를 정말로 만나서 허심탄회한 하소연을 나누는 것은 비슷하게 지치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미루는 일들이 있다. 열흘 전에 걸려온 엄마의 부재중 전화에 '내일쯤 다시 전화드릴게요' 하고 문자를 보낸 후 하루에 두 번씩 생각하면서도 여태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두 달 전 덥석 온라인으로 수강신청한 워크숍 동영상이 다섯 개쯤 밀려있다. 동영상 하나에 90분이니, 한 번에 몰아서 보려면 450분, 하루가 그대로 지나갈 일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18권은 읽지도 않았지만 반납하지도 않았고, 연체료를 물지 않으려면 연장 신청을 해야 한다. 가만, 마지막으로 거북이들에게 밥을 준 게 언제더라, 원래 소식은 장수에 좋다고 했었... 까지 생각하고 먹이를 두 배로 주고 온다.


가지런하지 않게 아무렇게나 빈 공간을 비집고 앉은 찻잔을 하나 꺼내고, 전기주전자의 버튼을 누른다. 작설차 통을 가지러 갔다가 향을 하나 꺼내 피운다. 거북이도 밥을 먹었으니 나도 차를 마셔야지,라고 생각하고서 참 훌륭한 인과관계라며 스스로 감탄한다.


삶은 지금도, 앞으로도, 가지런하지 않을테지. 안경과 잉크병과 일기장을 아무렇게나 밀어 두고서 피어오르는 향을 보며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가지런하지 않은 책상 앞에 앉아 작설차를 홀짝거리며 피어오르는 향에 감탄할 수 있으니, 꽤나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 거북이 밥을 줬으니 내가 차를 마시는 것과, 차가 맛있으니 삶이 훌륭한 것은 결국 같은 얘기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밤새 눌린 베개와 아무렇게나 걷어둔 주름진 이불속으로 다시 들어갈지도 모른다.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오전 내내 밍기적거릴지도 모른다. 흐트러진 채로, 자신에게 조금은 더 친절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아침의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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