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날의 이야기들
눈이 많이 내렸다. 안전상의 이유로 유치원은 휴원, 정확히는 자유등원에 들어갔다.
폭설과 강 추위로 인해, 자유등원에 맡긴다는 유치원 공지사항을 보며, 그럼에도 일단 등원시키려고 계획했지만 추가로 도착한 공지사항에 생각을 바꾸었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가정보육을 부탁드린다.'는 일본식 의사표현은 정중했지만 사실 가정 보육 하시라는 당부이기에, 자발적으로 일찍이 가정보육을 택하는 편이 현명했다.
가정보육에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남편과 아이와 나, 셋이 함께 하는 것이 계획일 뿐이었다.
날은 추웠고, 눈(雪)은 아름 다웠다.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 남편의 제안에 눈이 그치기 전에 나갔다. 행복해하는 아이와 눈을 맞으며 놀다가, 눈길을 걸어 얼마 전 발견한 파스타집으로 갔다. 우리 동네(?) 스럽지 않은 분위기의 그곳에서 크림 파스타와 브리또, 리소토를 각각 주문해 함께 나눠 먹고 다시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씩 눈은 잦아들고 있었고, 날은 점점 더 추워져 목욕 생각이 간절했다. 욕조에 40도의 뜨거운 물을 받아 홋카이도(北海道) 온천의 입욕제를 하나 넣고, 우윳빛으로 변한 물에 한참 동안 몸을 녹였다. 목욕을 마치니 추위도, 이런저런 생각들도 사라져 어느덧 기분은 한층 말끔해져 있었다.
다음날의 한국행을 위해 아이를 일찍 재우고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가지고 갈 것을 선별해 짐을 꾸리고, 한동안 비울 집을 점검하며 분주함 속 설렘을 느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자려고 누워 하루를 돌아보았다. 몇 차례의 '평온함(조용하고 평안함)'을 마주한 날이었다. 평온함은 지속되는 결과가 아닌 일시적으로 잠시 등장하는 상태나 감정이었지만, 찰나의 등장을 놓치지 않아 충만했다.
느리고 잔잔한 후쿠오카의 삶을 사랑한다. 어떤 상황은 그곳을 떠난 뒤에 좀 더 명확하게 보이는데 잠시 한국에 머물다 보면 좀 더 선명하게 알아진다. 후쿠오카의 삶은, 그동안 내가 머물던 삶보다 고요하고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나는 어느덧 그런 후쿠오카의 삶을 무척 사랑하고 있음을. 원한다면 내면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는 그곳의 시간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마지막 연재글을 쓰며 연재를 시작했던 마음에 관해 떠올려 보았다. '간절함'. 글을 쓰게 했던 마음은 간절함이었다. 후쿠오카에 머무는 삶의 시간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 지. 금. 쓸 수 있는 글을 쓰자는 간절함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후쿠오카에서 겪었던 시간들의 행복을 기록하고 싶었다. 일상이 머무는 곳에 있는, 그 구체적 행복에 관하여. 삶에는 아름다운 시간만이 이어지지 않는다. 후쿠오카의 삶 역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단박에 '행복'이라 이름할 만한 시간만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속상하고 화나고 실망하고 지루하고 답답하고 외롭고.. 단박에 '행복'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시간 속을 지나면서도 그 시간들을 다시 재구성하게 해 준 것은 삶에 품고 있는 '사랑'이고 '애정'이었다. 이미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관용적인 단어가 되어 때로는 그 진지한 뜻을 떠올리기 어려운 단어가 된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그 시간에 대해 설명할 가장 적확한 단어는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그 시간을 표현한다. 사랑이 고요한 후쿠오카의 시간들을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고. 단박에 '행복'이라 이름할 수 없던 시간들도 빛나게 바꿔주었다고.
아침 등원길의 잔잔한 풍경과, 느리지만 아름답게 흘러가던 하루의 시간들, 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만들던 시간, 용기 내어 친구를 사귀고 집에 초대해 함께 보내던 시간, 유치원에서 배우며 성장했던 시간들, 유치원 발표회와 학부모 참관 수업과 소풍의 기억들, 하루하루 내가 줄 수 있는 배움 이상으로 자라 가는 아이를 보던 기쁨. 때로는 뜨거웠고 때로는 고요하고 잔잔했던 시간들의 진실된 아름다움에 관해 찬찬히 떠올려본다.
그 추억들이 흐릿해지기 전에 부족한 나의 언어로 서툴지만 엮어보았다.
다가올 시간들은 알 수 없지만, 지금껏 살아온 시간들이 더해져 다채롭고 고유한 영롱한 빛을 띠게 될 것을 믿는다. 그 시간들을 기약하며 마지막 연재를 맺는다.
지금까지 '후쿠오카에서 아이를 기릅니다.'를 사랑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 주신 덕분에 마지막까지 기쁜 마음으로 연재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연재는 마치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후쿠오카의 삶은 이어지기에 좋은 글로 계속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2023년 한 해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