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군인에게 안전한 곳은 어디였을까
차(車)를 샀다. 아직 '짬'이 안 되지만 사버렸다. (여기서 '짬'은 군 경력의 뜻으로 쓰겠다.) 아이들에게 주기적으로 '소원수리(하급자가 기업이나 조직 내부의 불합리함이나 고충을 알려 이를 바로잡기를 청하면 상급자 또는 상급 부서에서 이를 받아들여 처리함. 또는 그런 일.)'를 받으면 어느 계급부터 어떤 일이 가능한지 소위 '짬'의 상징이 되는 행위들을 알게 되는데, 스케일이 다를 뿐 간부의 세계에도 은근 그런 부분이 있다. 운전의 경우 사고 예방을 이유로 임관 후 최소 3-5년 차쯤 되어야 가능한 분위기인데, 나는 중위가 된 후 차를 사버렸다. 편도 30분 거리의 영외 숙소에서 매일 출퇴근하고 야근하는 어려움을 이해받았는지, 차를 구매한 것은 의외로 수월하게 넘어갔다. (내 돈 주고 차를 사는데 눈치를 봐야 한다.) 차가 생기니 편리하지만, 행적이 유출되는 단점이 있다. 이를테면, '어제 거기 다녀오셨나 봐요? 입구에 차 세워져 있던데.''주말에 어디 안 가셨나 봐요. 차 계속 주차장에 있던데.' 같은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감안할 수밖에.
다시 명절이다. 이번 명절은 드물게 주말 포함 5일의 연휴가 이어진다. 간부들은 순번을 정해 교대로 출근해 중대에서 시간을 보내는데(민속놀이, 장기자랑, 영화 상영 등을 진행한다.) 나의 경우 연휴 초반에 중대 출근이, 연휴 마지막 날 당직 근무에 편성되어 있다. 연휴 중간 비어있는 날들은 망설이지 않고 본가 행(行)을 택한다. 비 공식적이므로 갑작스러운 호출에 대비해 전투복을 지참해서. 이틀간 민간 세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당직 근무를 앞둔 늦은 밤 돌아왔다.
연휴 간 군인 아파트 단지는 고요하다. 숙소 앞에서 내 방이 있는 아파트 건물을 올려다보니 여자들이 거주하는 꼭대기 층은 모두 불이 꺼져있다. 오늘 밤 우리 층에 아무도 없나 본데? 안 내키지만 일단 엘리베이터를 탄다. 꼭대기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펼쳐지는 암흑. 복도 불조차 꺼져있다. 그렇다면 긴 복도식 아파트의 어두운 복도를 뚫고 내 방에 가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 서둘러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간다. 아파트 단지는 고요하다 못해 불빛도 거의 없다. 일단 차로 가서 문을 잠그고 잠깐 고민해 본다. 얼마 전 사건사고를 다시 떠올려 본다. 내 옆방에서 지내던 타 부대 여자분 방에 밤늦게 갑자기 누군가 침입했던 사고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난무해 구체적 사실은 알 수 없었지만 팩트는, 밤에 갑자기 남자가 불쑥 들어와 여자분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라 결국 숙소를 옮겼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없는 층에서 혼자 자야 하는 일도 무서울 판에 사건사고가 일어났던 바로 옆인 내 방에 도저히 갈 수 없다. 물론 그 후 복도에 CCTV가 설치되고 순찰 인원이 편성되는 등 보안이 강화되었지만, 이 순간 복도는 어둡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나의 안전을 실시간으로 보장받을 수 없다. 방에는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까. 이 도시에 나는 친구는커녕 부대 사람 말고는 아는 사람조차 없다. 가능한 방안을 따져보자. 우선, 직속상관인 중대장님. 아무리 무서워도 이 시간에(밤 10시) 남자 중대장님께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연락을? 말도 안 된다. 패스. 동료 소대장들. 그쪽들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니 패스. 그렇다면 카페? 내일 24시간 동안 근무 서려면 나는 필히 자야 한다. 패스. 그럼 호텔? 밤에 개인 차를 끌고 시내 한가운데 있는 호텔에 들어가 아침에 호텔에서 나가는 모습은 누구 눈에라도 띌 가능성이 있다. 숙소가 있는데 굳이 호텔에?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거르자. 그렇다면 찜질방? 모텔? 거긴 외박 나온 아이들의 공식 숙소라고 보면 된다. 큰일 났다. 나... 갈 곳이 진짜 없다. 그럼 차에서 자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일단 아파트 주차장 자체가 휑해서 지금 차 문을 잠그고 있는데도 무섭다... 그렇다면 부대? 부대 여자 휴게실? 지금 상황에서는 거기가 제일 나은 선택 같다. 내일 09시부터 당직 근무 투입이니 동선도 적당하다. 정말이지 미리 전투복을 챙긴 건 신의 한 수다. 사실 부대도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대로 가자.
당직 사령께 이 상황을 설명할 일도 난처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오늘 당직 근무자는 타인에게 무심한 분이시다. 차라리 잘됐다. 지통실을 지나 여자 휴게실에 들어가서 불을 끄고 눕는다. 내일을 위해 얼른 자야겠다...
근데... 지금 복도 끝에 있는 지통실 빼면 이 큰 건물에 나 혼자 있다는 거잖아? 군부대는 괴담도 많고 무서운데... 심지어 오래전 듣고 완전히 잊고 있던 무서운 이야기들이랑, 무서운 영화 장면들은 왜 하필 지금 한꺼번에 생각나지? 안 되겠다. 일단 불을 켜자. 불을 켜고 보니 휴게실 문 위로 복도에서 볼 수 있는 창문이 있다. 저 창문 신경 쓰이는데 종이로 좀 가려두자. 근데 좀 싸한 느낌은 뭐지?
아... 지금 보이지 않는 공포가 문제가 아니다. 갑자기 물밀듯 밀려오는 기억들. 그동안 착실히 여군 여군무원 간담회 시간에 교육받고 공문으로도 전달받은 군대 내 수많은 사건사고의 기록들. 구체적으로 성(性) 관련 사건사고의 기록들이 이 시간 낱낱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배경이 부대 내 여자 휴게실이었던 사고도 있었던가? 배경이 여군 숙소도 있었던가? 범인은 역시 면식범이었던 것 같은데... 구체적 진실이 어느 쪽이든 이 순간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 캄캄해야 할 이 건물에 여자 휴게실만 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여기 누군가(여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거잖아. 위험하다. 나는 불을 끈다. 아니다. 이미 누가 여기 불 켜진 것을 봤으면 차라리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 다시 불을 켠다. 아니야. 아직 아무도 못 봤을 수도 있어. 아무도 없는척하는 게 더 안전할 거야. 다시 불을 끈다. 이미 무서움에 너무 사로잡혀 버려 어둠 속에 혼자 있으니 더 무섭다. 다시 불을 켠다. 어두운 건물에 혼자 있으니 모든 게 설득력이 있고 모든 게 무섭다. 그렇지만 이런 방면의 걱정은 차라리 과도한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렇지만 이제 불을 껐다 켰다 하는 것은 그만해야 한다. 누군가 멀리서 이곳을 보고 있다면 자꾸 불이 꺼지고 켜짐이 반복되는 것이 이상해서 와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중대 행정반으로 갈까. 행정반 옆 교관 연구실에서 자는 건 어떨까. 근데 나의 이 상황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무서워서 거기서 잔다고 설명하면...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 '소대장님은 어제 혼자 자기 무섭다고 교관 연구실에서 자던데?'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들린다. 아까 차라리 호텔에 갈 걸 그랬다. 근데 지금 다시 부대를 나가는 것도 이상하고 벌써 자정이 넘었다. 가능한 방안은 모두 훑었다. 결론은 오늘 밤 나는 여기서 자야 한다.
결국 휴게실 전등을 한쪽만 킨 뒤 어두운 쪽에서 내가 자고, 출입문 쪽은 밝혀두기로 한다. 한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아침이 될 때까지 수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열 번은 넘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동이 틀 기미가 보여 조금 안심이 된다. 근무 투입 전까지 조금이나마 제대로 자야지.
드디어 아침이다. 휴게실을 떠나기 전 내가 있던 곳을 정리하며 창문을 가렸던 종이는 그냥 두기로 한다. 지난밤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유일한 흔적을.
이제 근무를 서러 가자. 피곤해서 몽롱하지만 어떻게든 24시간은 버틸 수 있겠지. 피곤하면 잠깐씩 자야지.. 물론 지난밤의 일은 모두에게 비밀이다. 나의 내적 갈등들을 이해받을 수 없을 게 뻔하다. 당직사령도 창장님께 따로 보고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수롭지 않으신 표정을 보니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으신 듯하지만. 행정반에 가서 아무 일 없었다는 얼굴로 근무 인수인계를 받고 근무에 투입한다. 마지막으로 궁금해진다. 지난밤의 나는 정상이었을까. 이렇게 여자 군인으로 지내는 날 동안 나만 아는 일들이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