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내어준 과제
누군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일을 좋아한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 이후 내게 구체적 인물이 된 그와 첫인상 속 그를 나란히 떠올려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소대장이 된 후 새로운 형태의 첫 만남을 경험한다. 전입 신병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이제껏 내가 알던 만남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펼쳐진다.
회의 시간에 중대장님은 내게 엷은 노란색을 띤 얇은 책 두 권을 내민다. 우리 소대로 배치된 두 신병의 병영생활지도기록부이다. 마침 근무였던 나는 조용한 시간 두 아이의 생활지도기록부를 펼쳐본다. 앞장에 붙어있는 사진과, 입대 후 훈련소에서 써 내려갔을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새로운 만남을 준비한다. 다음날, 어느 순간 행정반 문이 열린다. "충성! 이병 ooo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한눈에 알아본다. '너구나!' 상상했던 이미지와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한 그를 보면 행정반에 들어오는 모습에서 조금은 그의 군 생활의 윤곽이 그려진다. 내성적이구나, 씩씩하네, 명랑하네, 당돌하네, 밝다... "반가워!" 곧 함께 앉아 면담을 시작한다.
처음부터 좋아할 것을 마음먹고 시작하는 관계가 있다. 내게는 소대원들과의 만남이 그렇다. 그들과의 만남은 좋아할 것을 예감하고, 좋아하리라 마음먹고 시작한다. 군 생활 간 감정의 찬란한 결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분명 소대원들에게도 지분이 있을 것이다.
소대원들을 좋아한다. 첫 만남부터 그들에 대한 감정은 호감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유형의 문제가 아닌, 나의 소대원이라는 이유 불문의 당위성 때문이다.
20대 초반, 빛나는 삶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그들. 아직 다 펼쳐보지 않은 삶의 찬란한 날들을 품고 있는 그들을 보면 가슴이 뛸 때가 있다. 한 명 한 명이 품은 그만의 세계를 보고, 영민함이 담긴 눈빛을 보며 내가 이렇게 큰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시간이 있다. 소망이 담긴 부담감을 안고 나는 바란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성장하기를. 그들도 나도 아직 다 펼치지 못했지만, 원하는 만큼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존재이기에. 부족한 나의 성품이지만, 그 마음은 내가 지닌 것 중 손꼽게 아름답고 진실한 것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들과 같은 공간에서 소대장의 날들을 지내며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할 것을 예감한다. 우리 관계의 첫 시작, 우리가 만나게 된 이유를 떠올린다. 우리는 군인이기에, 군인이 되었기 때문에 만났다. 우리가 만나게 된 그 이유가 역설적으로 우리의 관계를 제한할 수 있음을 자각하며, 가슴에 엷은 칼이 스칠 때가 있다. 소대장과 소대원은 얼마만큼 서로에게 진실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다른 모습으로 만났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명확히 서로의 역할이 규정되고, 규정해야 하고, 규정된 역할을 따라야 하는 이 관계가 나를 괴롭힐 때 우리가 다른 형태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다. 군 조직의 가치와 나 개인의 가치는 수없이 충돌한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충돌하는 조직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 속에서 느끼는 괴로움은 몸의 힘듦과는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그 시간 누구보다 충실하게 조직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나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와 겉돌 때가 많아 나는 괴롭다. 나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킬 때,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을 때, 과실을 눈감아 줄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 죽어도 내고 싶지 않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나는 괴롭다. 괴로움을 감추고 행여나 나에게 날아올 날카로운 화살을 경계하며 앞서 날을 세우고, 그럴수록 커져가는 자괴감을 감각한다. 시간이 흘러도 답을 알 수 없을 문제들에 붙잡혀 소대장의 시간을 견딜 때가 있다.
그 속에서 나의 비겁함과 대면한다. 조직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충돌할 때 조직의 목소리를 내며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미움받는 일이 끔찍이도 싫어서,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기어이 구차하게 덧붙이는 나를 견디는 일이 나는 괴롭다.
가끔 우리는 온갖 클리셰가 범벅이 된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후임에게 불합리한 일을 강요하는 선임이 된 아이를 볼 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일을 내 앞에서는 죄송하다며 반성하는 기색을 띠고 재차 반복하던 아이를 볼 때, 본인이 당했던 일을 선임이 되어 같은 표정으로 하고 있는 아이를 볼 때, 내 선에서 눈감아 줄 수 없는 규정을 어긴 아이를 볼 때 찾아오는 허탈함과 실망. 그러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아이의 경우 배신감은 몸집을 불려 그 실망감을 당사자를 넘어 모두에게 적용해 ‘결국엔 너도 별수 없겠지’라며 누군가를 앞서 재단해 버릴 때도 있다. 냉소적이 되어버린 마음은 전입 신병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너도 지금은 눈을 빛내고 있고 한동안은 나를 의지하겠지만, 언젠가는 너도 이 시절을 거쳐 달라지는 거 아니냐는 나의 회의감을 그에게 투영해 애초에 마음 주지 말 것을 계산할 때 나는 스스로가 조금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떨까. 그들이 어떤 클리셰의 시각으로 나를 볼지 나는 알고 있다. 본연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관계없이 군의 간부라는 자체로 나를 재단해 버리는 일이 느껴질 때. 그리고 실상 그들의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나를 알아챌 때. 우리는 한순간 멀어지고 한동안 서먹해진다.
우리의 이 밀당은 우리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부족하고, 끝없이 실수하고, 그럼에도 성장하고, 성장해야 하기에. 그럼에도 마침내 내가 이 만남을 통해 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서로로 인해 조금이나마 성장하고, 이 만남이 끝나는 날 웃으며 헤어질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게 있을까.
다시 첫 면담을 위해 내 앞에 앉은 전입 신병들을 본다. 맑은 눈동자와 긴장한 표정. 주변을 둘러보는 살짝 겁이 느껴지는 태도까지. 그 순간만큼은 그의 키와 덩치와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관계없이 보호본능만을 부르는 내 앞의 사람을 보며 나는 자각한다. 이 사람이 나에게 구체성을 띤 인물이 되어가고 그로 인해 분노, 기쁨, 실망, 슬픔, 허탈, 보람... 온갖 종류의 감정의 사계절을 겪는다 해도 결국 나는 첫 만남에서 이 사람을 좋아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된 사람임을. 이 만남이 내어준 과제를 결국 풀 수밖에 없음을. 악수를 청한다. "잘해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