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떠나도 괜찮을까
평시(平時)이기 때문일까. 유례없던 평온한 날이 이어지고 있다. 중대의 선임 소대장이 된 나는 탄약 소대장에서 관리 소대장으로 직책이 바뀌었고, (실무는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 중대 전체 업무 분장을 맡아 병력 통제권이 늘어난다.) 후임이 한 명 더 들어왔으며, 중대장님과의 케미도 좋아 실력의 점핑(jumping) 까지는 몰라도 업무 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통틀어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 새 후임으로 들어왔다. 그간 나는 부담스러워서 제대로 나서지 못했던 일들을 후임은 수월하게 해결하는 것을 보며 든든한 조력자가 생겼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을 비슷하다. 중대장님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중대장님 또한 후임을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이번에 일 잘하는 소대장이 왔다고. 말하자면 A급으로 분류되는 소대장이 들어왔다고. (간부들 사이에서 일을 잘하는 아이들은 A급이라 칭해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마음은 '안심'이었다. 마땅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를 능가하는 후임을 둔 자의 여유가 이런 것이었던가. 묻고 또 물으며 선임이 전역하는 전날까지 의지했던 나랑은 달라 마음에 든다. 질투의 감정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 것은 그의 인품 때문일 것이다. 영민하고 인품마저 훌륭한 그 아이는 결코 나를 앞서지 않는다. 선임 소대장으로서 나의 면을 세우며 뒤에서 본인의 몫을 감당한다. 눈빛과 태도를 보면 드러난다. 그 모습들은 어떠한 연출이 아닌 애초에 진실한 사람임을. 진지하지만 명랑하고 센스마저 갖춘 그의 인품 한구석을 내게도 끌어와본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력에서 비롯된 여유가 필요한 법인데..
알아버렸다. 후임을 극찬하신 중대장님께서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 어쩌다 알게 된 것은 아니고 그냥 파헤쳐 보았다. 소대원들의 상담 일지를 기록하기 위해 중대장님의 연대 행정 시스템 아이디를 공유하고 있다. 중대장님의 아이디로 들어가면 간부들 기록도 조회가 가능해, 그곳에서 중대장님이 기록한 나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유약한 성품과 체력이 약하고...로 시작되는 기록을 읽으며 통쾌했다. (물론 그 뒤로는 긍정적인 말들이 이어졌다.) 아마 인간적으로 나를 좋아하시고 잘해주시는 중대장님께서 업무적으로는 그토록 나를 정확하게 평가하고 계신 것에서 비롯된 통쾌함이었으리라.
이제 더 이상 장기 복무를 지원하지 않는다. 복무연장(기존에 정해진 의무 복무 기간보다 긴 기간을 복무하는 것)도 신청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폭탄(!)들을 피하며 유례없이 평온한 날을 누리고 있다. 폭풍전야일지 모르지만 아니라 믿고 싶은 평온함을. 나는 이제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나는 잘하고 있다. 소대원들은 사고 치지 않고, 자기들끼리도 잘 지내 보인다. 주말에는 근처 부대 친구들과 바다에 가기로 예약이 되어있다. 이렇게 평온한 날을 이어가다 보면 이 조직에서 나에게 주어진 날이 끝나겠지…라고 생각한다.
일과를 마치고, 소대원들을 모아 오늘은 족구를 한다. 오늘따라 유난히 신들린 서브 실력을 발휘해 서브만으로도 점수를 내며 즐거운 시간 속에 있는데 전화가 온다. 행정과장님이다. 진작에 거절했던 제안인 '복무연장'에 관함이다. 이미 기한을 넘겼어야 할 그 공고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 “오. 늘. 까. 지. 라는데 한번 안 해볼래? "
홈쇼핑의 오늘만 이 가격에. 이 시간만 이 가격에 라는 미끼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물던가. 그들은 결코 어리석어서 속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속는다. 그만큼 그 전략은 유효하다. 작정하고 속이는 걸 알면서도 속아줄 만큼. 나에게 주어진 미끼는 무엇인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연대해 평온함 속에서 빚어낸 미끼를 나는 진지하게 본다. 미끼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본다. 보는 것뿐이다. "일단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좀처럼 오지 않는 신들린 서브는 잠시 내려놓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보는 것뿐.
근데 그와는 별개로 생각의 회로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모르겠다. 근데 진짜 모르겠다. 이제 이대로 다 마무리 짓고 떠난다면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모든 걸 두고 떠나며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입대 후에도 원래 내가 속해있던 세계를 수없이 뒤돌아보던 시간들... 이대로 전역하면 반대로 다시는 이곳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조직과의 만남을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걸까. 한번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나는 얼마만큼 나를 쏟았을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을 만큼 쏟고 경험하고 이곳을 떠나는 것인가.... 이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여기고, 아무렇지 않게 원래 내가 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얼마 전까지 이곳을 떠나리라고 그토록 확신했던 마음은 왜 갑자기 희미해지는 것일까. 혹시 '오늘까지'라는 말에 없던 미련이 생긴 것일까.
언젠간 창장님은 말씀하셨다. 군 생활이 힘들다고 토로하던 날, 너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고. 조금 더 이 길 위에서 부딪쳐 보고, 앞으로 나아가 보면 좋겠다고. 초급장교의 시간을 넘어 조금만 더 성장해 보고 결정하면 좋겠다고. 지휘 관계를 떠나 같은 길을 앞서 간 선배의 조언으로 듣고 당시에는 흘려보낸 그 조언은 왜 생각나는 걸까. 중령과 나(중위) 사이에 놓인 무수한 시간의 강들. 그 시간의 강에 담긴 것들이 왜 아주 조금 궁금해지는 걸까.
소대원의 어머님을 만난 한날의 기억도 떠오른다. 한 소대원의 생지부(병영 생활 지도 기록부)를 통해 어머님이 여자 장교 출신이라고 적혀있어서 궁금했는데, 면회를 오셨고 순찰 중에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초면인 나를 선배로써 반겨주셨던 그분. 눈빛에서 강인함과 총명함이 느껴졌던 그분. 기왕 발을 들였으니 원하는 만큼 이 길을 끝까지 가보시고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해주셨던 말씀. 흘러갔던 그 찰나의 만남은 왜 다시 떠오르는 걸까.
모르겠다. 나의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리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아주 조금은 더 머물러 볼 수는 있지 않을까. 마음이 원하는 길을 정확하게 알게 되는 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입장 정리를 마친 나는 일단 아무 내색 없이 행정과로 들어가 과장님과 잠시 의논하는 행위를 거친다.(복부 연장은 최소 1년부터 최대 4년까지 지원할 수 있다.) '유예' 나의 결정은 유예다. 이 길을 좀 더 걸을지 그만둘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단은 아주 조금 더 이 조직에 머물겠다고. 과장님은 제안을 건넨다. 그렇다면 1년은 너무 짧고, 4년은 너무 길 수 있으니 일단 2년이 어떻겠냐고. '대위'까지 해보고 그 시간 동안 살펴보고 조금만 더 고민해 보라고. 그렇게 합의를 완료하고.... 신청서를 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말 짧은 순간 벌어진 일이다.
행정과를 나오며 유례없이 평온했던 최근의 날들이 스쳐간다.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연대해서 나를 위한 밑밥을 깔던 건 아니었을까. 부대는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롭다. 부디 이 평온함과 고요함이 폭풍 전야에서 비롯된 고요는 아니기를 바라며, 찾아오려고 틈을 보는 불안함을 내몬다. 퇴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