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이지 않은 이야기
지금 나는 방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다. 오늘은 공지영 작가의 책이다. '격려'의 컨셉으로 써진 책 같아서 골랐는데 옳은 선택이었다. 작가가 딸에게 들려주는 한없이 다정한 문장들을 나에게도 적용해 위로를 함께 누리고 있다. 읽다가 잠이 오면 자다가, 다시 깨서 읽고 있다. 평일을 이렇게 숙소에서 보내는 것은 전투 휴무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다.
아침에 배가 너무 아파서 약을 먹었다. 오늘따라 약이 듣지 않아 다시 먹고 또 먹고, 속이 쓰릴 때까지 먹었는데 약이 듣지 않아 마침내... 중대장님을 찾아갔다. 다행히 오늘은 비가 와서 숙영지 청소를 하고 설렁설렁 정신교육 영상을 볼 예정이라 나의 부재가 피해가 될 만큼 바쁜 날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별일 아닌데, 기어이 나의 마지노선을 넘는다는 마음으로 갔다. 안색이 창백했을까. "배가 너무 아파서."까지만 꺼냈는데 더는 묻지 않고 가서 쉬라고 하신다.
특별히 개의치 않아도 될 이야기인데, 단수가 아닌 복수로 이번 고백을 하고자 한다. '나' 개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인 '우리'로. 어떤 이야기들은 한 명의 이야기가 모두의 이야기이며, 모두의 이야기가 한 명의 이야기이므로 지금은 모두의 힘을 빌려보자. 이것은 그날의 이야기이다. 마법의 그날.
후보생 시절부터 느꼈지만, 여자 군인의 그날은 존재하지만 자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우에 따라 아주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당사자 포함 조직에 있는 모두에게 없는 일처럼 여겨질 확률이 높다. 군인은 머물다 간 곳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훈련을 마친 뒤 전장(戰場) 정리 상황에서 적용되는 이 말은, 특정 날을 겪는 여자 군인에게 더더욱 반드시 적용된다. 후보생 생활관에서도 절대 보이지 않게 수거되었던 위생용품. 대다수의 남성으로 이루어진 조직에서 거의 모든 일이 내부 인력으로 처리되는 조직의 특성상 수긍할 수 있는 그 일은 야외 훈련을 나가면 엄격함이 더욱 심해진다. 야외 교장 화장실에 있는 쓰레기통을 절대 사용할 수 없고, 지정된 쓰레기봉투를 이용하도록 사전에 당부받는다. 위생용품은 그렇다 쳐도, 그것의 시기는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그것은 질병이 아니기에 후보생 교육 과정 중에는 그날에 열외가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는데, 그럼에도 장기간 야외 훈련을 떠나거나 행군과 겹치면 본인의 몸 상태에 따라 질병에 상응할 만큼 최악일 수 있다. 그래서 몸에 좋을 수는 없겠지만, 알아서 미리미리 호르몬 조절을 위한 약(피임약)을 먹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보생 시절에는 여자 훈육장교님 밑에서 같은 성별의 동기들과 함께 지내며 공감대 형성이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질적 문제는 대부분 홍일점이 되는 자대 전입 이후 시작된다. 일단 '보건휴가'는 있다. 산부인과 진료, 임신, 생리 등의 이유로 쓸 수 있는 무급 휴가이다. 하지만 부득이한 이유가 아니면 '그날' 그 휴가를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난 떨어 보일까 봐, 민망해서, 다른 누구도 쓰지 않아(못해) 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까 봐, 바쁜데 눈치 보여서, 역차별의 시선을 받을까 봐, 다시 생각해도 민망해서, 그날임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이해받기 어려워서...
혹시 내가 유별난 걸까 싶을 때는 도움 안 되는 자기 검열은 관두고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는 편이 차라리 낫다. 관련 인터뷰를 살펴보자. 군은 여전히 폐쇄적이라 '생리' 언급조차 꺼린다는 이야기,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갑자기 생리가 시작되었는데 여자는 혼자뿐이라 급히 수습하고 오는데 바쁜데 왜 농땡이 치냐는 질책에 사실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일, 부대에서 생리대를 구할 수 없으니 미리 챙기지 못하면 겪게 되는 난처함, 훈련이나 행군 간에 피임약을 자주 먹어 건강이 나빠졌지만 격오지에서 산부인과에 갈 수 없어 제때 치료를 못 받고 훈련소에 있는 남자 의무장교에게 말하기 껄끄러웠던 일. 모두의 일이지만, 결국 개인의 일이 되는 일. 이것을 공감 못할 여자 군인은 단언컨대 없으리라.
여기까지가 우리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이 모든 것을 수긍하고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알리지 않고 최대한 참고 버틴다. 성격상 개인이 정한 어떤 마지노선 일지도 모른다. 이것까지는 굳이 알리지 않겠다는. 근데 관련 인터뷰를 검색하다 어느 부분에서 조금 멈칫했다. 그것에 관한 언급을 꺼리고 금기시되는 이유가 '남성들이 안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어서.'라고 하는 분도 있다고. 음.. 어느 정도 연차와 나이가 있는 분의 발언이라는 건 알 것 같다.
개인이었다면, (절대) 꺼내지 않을 이 고백을 꺼낸 이유는 명확하다. 나는 연대(連帶)를 생각하며 이 고백을 꺼낸다. 나조차 앞서 언급한 이유들로 그날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은, 같은 길 위에 있는 다른 이들의 복지까지 약화시키는 일이 될까 봐. 배려가 필요한 이들은 배려를 받기를, 필요하다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요구할 수 있기를, 배려를 몰랐던 이들은 배려를 알아채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고백을 한다. 훗날 성장해 있을 나를 믿으며 이 고백을 꺼낸다. 한창 예민한 나이인 지금, 가볍지 않은 이 고백이 훗날 나에게는 지금보다는 가벼운 고백이 되어 있을 것 같아서. 시간이 흐른다면 나도 지금보다는 담대해 있을 것 같아서. 좀 더 어른이 되어 있을 것 같아서.
결론은 지금 나는 방에 누워서 책을 보고 있다. 사실 큰 의미 없을 나 개인의 마지노선을 부대에서 넘은 지 안 넘은 지는 모르겠다. '배가 아프다'까지만 했는데 가라고 하셨으니. 이러나저러나 딱히 상관은 없지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후임들이 행여 날 찾았을까 봐 아주 살짝 신경 쓰인다. 그리고 큰 의미는 없다, 상관없다고 재차 반복하는 자체가 사실 무척 신경을 쓴다는 것이리라. 같은 경우가 또 발생한다면 다시 곤란할 것 같고 버틸 때까지 버틸 것 같은 그런 느낌. 역시 어떤 일들은 개인의 일이어도 단체의 일이어도 끝내는 어렵다. 연차를 더해가도 여전히 나는 많은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고, 아마 여자 군인 생활을 하는 동안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그나저나... 오늘 읽고 있는 책 좋다. 모든 걸 떠나서 공지영 작가의 '필력'만 놓고 봤을 때.. 부럽다. 나도 이런 조곤조곤 다정한 글 쓰고 싶다. 책에 등장하는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인물도 인상적이다. 유럽 의회원으로 5년 동안 활동하다 어느 날 고비 사막으로 떠나기로 결심하는 이 대목. '나는 온갖 의무들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는 항상 어딘가에 출석해야 하고, 언제나 연락 가능해야 하고, 어떤 질문에 대해서든 늘 답변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그 모든 삶으로부터 떠나야 했다.' 이거.. 너무 내 얘기 같다. 어쩌면 이것은 혹시 나의 미래에 대한 예고인가? 얼마 전 신청한 복무연장 결과도 아직 안 나왔는데 이거 보니깐 떠나고 싶다. 근데.. 진짜로 군에서의 모든 시간들이 끝났다면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어질 것 같다.
책 속을 헤매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다. 몸은 괜찮아졌다. 내일은 날씨도 맑고, 밀린 일도 많은데 멀쩡한 상태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