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군인이 겪는 예비군 훈련(2)
예비군 훈련 첫날, 22:00-00:00시 초번 당직 근무를 마치고 잠깐 눈을 붙였더니 이튿날 05:00시다. 점호 전에 머리를 감으려면 지금 일어나야 한다. 간부 이발소가 비어있는 지금이 기회다. 빠르게 머리를 감고 준비를 마치고 06:00시 아침 점호에 참석한다. 예비군 훈련 2일 차. 온전히 예비군 훈련에 매진해야 하는 날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예비군들과 함께 도수체조로 하루를 시작한다. 다행히 구보가 생략된 합리적인 점호다.
지금 머릿속을 가장 크게 점령한 생각은 '교관 업무'다. 예비군들 대상으로 '탄약보급' 강의가 예정되어 있다. 어려웠던 어제의 '인솔'은 쉽게 느껴질 정도로 부담이 크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인원들을 집합시켜 함께 탄약고 지역으로 이동한다. 하루 사이에 군 생활의 감을 찾은 예비군들은 어제보다 수월하게 집합에 응해주고 있고, 일말의 포기의 기운도 느껴진다. 간부들 역시 어제보다는 복장을 갖추고 대형을 준수하는 부분에 너그러워졌다. 기싸움은 끝났다. 상대를 자극해서 피차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서로 알았다. 부디 그 기운이 교육 참여에도 이어지기를.
나는 교육 조교 두 명과 먼저 교육장으로 이동한다. 교육조교는 눈치가 빠르고 마음의 품이 넓은 아이들과 일하자는 나름의 기준으로 직접 뽑았다. 지금 예민한 사람은 나 하나로 충분하니깐. 그리고 예비군 상대만으로도 피곤한 와중에 교육 외의 일은 본인들이 알아서 챙길 만큼의 눈치도 필요할 것 같아서. 영민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보니 확실히 덜 불안하다. 강의실에서 교보재를 세팅하고 함께 예비군들을 기다린다. 긴장감이 크다. 아무도 쭉 안 왔으면 싶으면서도, 차라리 모든 걸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조금씩 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침착하자.. 문이 열리고 입장하는 백여 명의 사람들... 죄송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안 하셨는데 반갑지 않다. 교육 대상자를 안 달가워하는 나의 교육자 마인드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모두 앉기를 기다린다. 착석을 마쳐도 분위기가 어수선해 시작할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때맞춰 정작 과장님(소령)이 오신다. 평소 내 교육시간에 종종 등장해 매의 눈으로 살피시던 과장님이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보통 같았으면 민망하고 불편해서 빨리 나가시기를 바랐겠지만, 오늘 과장님은 강의가 끝날 때까지 계셔도 된다고 (마음으로) 허락하며 강의를 시작한다. 근데 표정을 보니 곧 나가실 것 같다. 역시... 나랑 안 맞아.
예상했듯 예비군 강의는 난도가 높다. 가장 궁금한 것은 지금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간부들이 교육장 중간중간을 돌아다녀도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대부분 의욕이 없는 백 명이 넘는 인원에게 육성으로 강의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실시간으로 찾아온다. 잡담과, 중간중간 치고 들어오는 강의와 상관없는 질문들과,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일부의 시선들과, 웃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리고 주무시는 분들까지. 아니다. 주무시는 분은 괜찮다. 주무시는 분들은 차라리 쭉 주무시길 바라는 나는 역시 강사의 자질이 글렀다. 수정한다. 예비군 강사의 자질이 글렀다. "간부님들. 주무시는 분들 (제발) 깨우지 마세요. 크게 잡담하시거나 교육 중 무례하게 치고 들어오는 분들만 자제시키시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절감한다. 철저하게 현역 군인의 견장에 기대 현역 군인을 대상으로 간부 역할을 수행했던 나의 역량을.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지금 내가 나에게 부여해야 할 정체성이다. 간부로서의 나의 위치, 여자 군인으로서 나의 입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말을 상상해 본다. '여자 장교를 뽑아놨더니 예비군들한테 휘둘리고 강의도 형편없더라.' 절대 안 될 일이다. 나 개인으로서도 자존심이 상하고, 조직을 생각하면 용납할 수 없다. 이 순간은 계급의 힘이라도 끌어와야 한다. '나는 육군 중위다. 여기는 훈련장이다.' 생각하며 강의를 이어간다. 그리고 내가 뽑은 조교들이 나를 보고 있음을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보인다. 중간중간 경청하는 눈빛들이. 구원이 되는 그 눈빛들에 기대 강의를 이어간다.
마침내 강의를 마치고 묻는다.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질문이 없기를 바라며 묻는다. 바람이 무색하게 누군가 손을 든다. 표정을 보니 감이 온다. 강의 관련 질문일지 그 외의 것일지. 역시 그러했다. '근데 소대장님은'으로 시작하는 질문을 최대한 사무적으로 마무리 짓고 교육을 마친다. 나를 지나쳐 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들려오는 말. "딱딱하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딱딱함이야말로 모든 어색함과 불쾌함을 뚫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동적 선택일 뿐. 나 들으라고 했을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일관하고 모두 나가기를 기다린다. 그 와중에 '수고하셨습니다.'라며 인사하는 매너를 장착한 사람들 덕분에 마음이 조금 나아진다. 한고비는 넘었다. 이어서 옆 중대 예비군 백여 명을 대상으로 두 번째 강의를 이어가야 한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근데 기분이... 그지 같다.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중에 조교들은 강의장을 정리하며 알아서 움직인다. 한 번만 더 하면 이번 차수 예비군 교육은 끝이잖아 생각하며 기운을 끌어모으는 순간,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서슬 퍼런 기개와 눌러쓴 전투모 아래로 보이던 서늘한 무표정의 누군가가. "여자로 보이지 말 것!" 아... 나의 훈육장교님. 모든 훈련의 최전방에 선 보병 여군 장교인 그분은 이 마음을 뼛속까지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장교가 되기 이전부터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알고 계셨다. 그게 그 뜻이었어? 여자로 보이지 말 것, 눈물을 참을 것, 과도한 웃음조차 자제할 것. 그게 설마 이 뜻은 아니지? 오랜 시간이 지나,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당시 그분께 비로소 감응한다. 또 뭐가 있었던가. 이럴 때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과 쉽게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가. 와... 이제 실소가 나오려고 한다. 그 기분은 끝내 모르기를.
근데 이 씁쓸함 뭐지? 나 혹시 지금 좀 슬픈 건가? '여자로 보이지 말 것'의 뜻을 알게 되어 슬픈 건가? 그 말의 뜻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서 슬픈 건가? 그 말의 뜻을 모르던 지난 시간의 나를 애도해야 해서 슬픈 건가? 그렇다면 결국 이것이 여자 군인 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이 모든 상황에서 굳건하기 위해 나는 독기로 무장해야 하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강인해질 수는 있어도 독해질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 않다. 절대로.
시간이 되어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한다. 어떻게 마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오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구체성이 빠르게 흐려지나 보다. 이번 차수의 교육이 끝났고, 1차 예비군 훈련도 끝이 보인다. 이 시간 이후는 뭘 해도 이 강의보다는 수월할 것이다.
드디어 밤이다. 내일이면 퇴소하는 말년의 예비군들에게 오늘 밤 근무는 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근무시간에 행정반에 조용히 있을 수 있을 테니 반가운 소리다. 오늘 나의 근무 순번은 말번(04:00-06:00)이다. 내일은 03:30에 하루가 시작될 테니 한시라도 빨리 자자.
마침내 1주 차 예비군 훈련이 끝난 주말이다. 근무도 없고, 출근할 필요도 없어서 숙소에서 쉬는데 전화가 온다. 모르는 번호. 일 관련 연락일 수 있으니 일단 받자. "중위님..." 낯선 목소리 같은데 들어본 목소리. 설.... 마? 예감은 정확하다. 훈련 간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 그 인원이다. 순간 분대장을 의심한다. 혹시 이 자식이? 아니었다. 행정반에 붙어있는 중대 조직도 및 비상 연락망에서 연락처를 봤다며(분대장 미안;;), 군인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내가 궁금하고 만나보고 싶다고 한다. 좋게 봐주신 건 무척 감사하지만, 더 이상의 연락을 이어가기는 원치 않는다는 멘트를 정리하기도 전에 거절의 답을 말하고 있음을 보며 본능의 정확성을 깨닫고 예의를 갖춰 통화를 마친다. 이어서 문자가 온다. 답은 하지 않는다.
마침내 한고비를 넘었다. 이번과 동일하게 예비군 훈련을 세 번 (2,3,4주 차) 더 마치면 올해의 모든 예비군 훈련이 끝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금은 이 주말만 바라보자. 마침 옆방 동기가 방에 있다. 함께 바람이라도 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