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
이 부대의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이 주는 특별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사로잡혀 버리고 싶다. 마지막이니 만큼 특별한 감정을 입고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이별을 맞이하고 싶은데... 나중에 이성이 돌아오면 민망할 것 같아 잠잠해지고 싶기도 하다. 결국 감정의 영역은 감정에게 맡기며.. 마지막 출근을 한다.
떠날 준비는 마쳤다. 큰 짐들은 주말에 차량을 섭외해 본가로 보냈고, 지내며 하나 둘 사모은 책은 부대에 기증했다. 후임자분께 업무 인수인계도 마쳤고, 신임 중대장 환영식을 겸한 중대 송별 회식도 했다.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던 분들이나 고마웠던 분들은 따로 찾아가 식사를 하거나 인사를 드렸다. 모두 끝났고, 전출 신고만 남았다. 어제 미리 내려온 동생은 고맙게도 돌아가는 길 운전을 맡아 주기로 한다. 장시간 고속도로를 밟을 자신도 없고, 혼자 떠나면 마음이 복잡할 수도 있는데 다행이다.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창장님은 오늘 계시지 않는다. 대리로 임무 수행 중이신 과장님께 전출 신고를 해야 하지만, 창장님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아 전화로 인사드리며 훗날을 기약한다.
이제 전투복을 입고 방을 나선다. 위병소를 지나 중대로 가는 길, 조금씩 이곳에서 쌓였을 감정들이 마지막을 입고 찾아와 일상의 모든 것이 갑자기 특별해진다. 인사하는 위병 근무자들, 긴 시간이 담긴 연병장, 부대 전경, 수없이 오가던 중대 막사와 본청... 3년간 머물던 일상의 모든 풍경은 어느새 낯설고 특별하게 변해있다. 이 감정을 곱씹고 받아들이면 정말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것 같은데, 곱씹지 않고서는 헤어짐을 실감할 수 없어 이 상황에 깊이 들어가고자 마음먹는다.
중대가 보이는 순간 잠시 한때의 바람을 떠올린다. 언제였을까. 언젠가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마침내 중대장이 되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고. 중대장이 되면 더 성숙하고, 더 멀리 보고, 더 강인해질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하던 군인의 본질에 깊이 다가가 완전한 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구체적으로 겪을 수 없겠지만, 어떤 의문은 끝내 확인해 보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으리라. 이 부대의 시간 내내 나는 결국 나를 넘지 못했다. 아마 중대장이 되었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한계였지만, 나는 내 그릇을 깨뜨릴 자신이 없고 원치 않았기에 원했던 한계였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끝내 '나'로 남고 싶었으니깐. 나를 잃기 싫었으니깐.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조직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가장 나다운 선택이었을 테니.
후임 중대장님을 본 뒤 그 생각은 명확해진다. 여자분. 내면이 안정되어 보이는 분. '믿고 따라와'라고 말하지 않아도 믿고 따라가고 싶은 단단함과 강인함이 느껴지는 분. 내면이 강인한 자는 그 기운이 자신을 뚫고 나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기운에 이끌려 '저분께 기대고 싶다'라고 마음은 알려준다. 새로운 지휘관을 보며 나를 인정하고, 이제 나에게 주어진 다른 출발선으로 향한다.
전출 신고를 마치고 중대로 돌아오자 송별회가 준비되어 있다. 나를 위해 제작된 영상과 중대원이 적어준 롤링페이퍼. 모두 함께 그동안의 생활을 담은 영상을 시청하고, 코팅된 롤링페이퍼를 선물로 챙긴다. 소중한 자산이 될 이것을.
마지막 인사의 시간. 일순간 진지해지는 눈빛들. 예상 못 한 시간이었지만 마지막이 주는 간절함과 애틋함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말한다. 함께 하던 시간 동안 내가 조금이나마 좋은 영향을 주었고 우리가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이곳에서 보낸 나의 시간도 보람 있을 것 같다고. 많이 고마웠고, 언젠간 다시 만나자고. 그것은 온전한 나의 진심이었다. 나를 보는 눈빛들이 따뜻해서, 경청하는 태도가 진지해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고마워서... 미안해서. 그리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결국. 조금 울었다.
현장으로 일하러 가는 아이들을 배웅하고 행정반 정리를 끝으로 이곳을 떠난다. 영내 업무를 하던 아이들이 따라 나와 차를 타고 떠나는 순간까지 배웅해 준다. 평소에 잘하지 오늘따라 왜 안 하던 짓 하냐고 웃으며 떠나려 했는데, 다시 눈물이 난다. 모두와 악수를 끝으로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탄약고를 둘러보고 이 부대를 떠난다.
아이들이 잠시 일하다 멈추고 보는 것이 느껴지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더는 돌아볼 수가 없다. 이 순간이 생각날 것 같은데, 후회할 것 같은데, 돌아볼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마무리조차 나답게 미련 한 조각을 남기고 첫 부대를 떠난다.
모두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더는 이 부대에 올 일도, 이 도시에 올 일도 없을 것이다. 우연이 아니면 이곳에서 알게 된 이들도 더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는 이곳에 오기 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이곳을 떠난다. 이곳에서의 시간들과 받은 진심이 내 안에 스며 사는 동안 나를 강하게 잡아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이 도시가 떠오르는 순간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 시간 속의 나와 그때의 군 생활까지 함께 떠오를 것이다. 내게 고유한 빛을 더해준 나만의 고유한 기억들을.
행복했고, 좋았고, 설레었고, 즐거웠고, 보람 있고, 슬펐고, 힘들었고, 좌절했고, 홀로 남겨진 시간 속 치열하게 겪었던 성장통들. 그 시간을 업고 떠나는 이 순간, 이곳에서의 시간은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없었음을 마침내 깨달으며 이곳을 떠난다. 이 감정이 마지막이 주는 마법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속고 싶은 마음으로 나는 조금 용감해져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 한동안 채 가라앉지 않을 마음을 달래며 차는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나는 잠을 청한다. 이제 휴가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