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2. 이스탄불 2일차 - 시내 관광, J씨 친구
건너편 창고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덕분에 호텔 직원들이 얼마나 성실한지 밤새 느낄 수 있었다. 굉장한 서비스를 보여주는 호텔이 아닐 수 없다. 방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 짐을 싸놓고 조식을 먹고 나왔다. 조식은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괴레메에서의 조식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도 이곳에는 터키판 누텔라가 있어서 터키쉬 베이글에 발라먹어 봤는데, 이건 끝도 없이 들어갈 맛이다.
가야 할 포인트는 대략적으로 정해 두었지만 어디를 어떤 순서로 어떻게 이동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우선 어제 식사를 한 레스토랑 옆에 지하 저수조가 있었던 것이 떠올라서 거기서부터 출발하기로 했다. 막상 지하 수도 입구에 가니 입장료가 꽤 되는 데다가 뮤지엄 패스에 해당이 안 된다. 살짝 고민했지만 가야 할 곳이 많기에 우선은 패스하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오기에 부담스러운 거리도 아니니까 말이다.
바로 슐레이만 광장으로 향하는데 스타벅스가 보여서 가격 확인도 할 겸 들어갔다.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단돈 3000원이다. 하나 사들고 조금 걸으니 오벨리스크가 우리를 반겨준다. 이 오벨리스크도 로마 시대에 약탈 아닌 약탈(이집트는 로마 황제의 영지로 취급되었으니)을 해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프랑스에 있는 오벨리스크보다 일찍 훔쳐온 만큼 거대한 사이즈가 인상적이다.
바로 옆에 이슬람 박물관이 보여서 들어갔다. 카페트나 서예 등 이슬람 문화를 대표할만한 소장 품과 함께 오스만 제국 시대를 재현해 놓은 밀랍 인형도 있었다. 그림자 인형극에 사용했던 인형 등 부담 없이 가볍게 구경할만한 전시품들이 많이 있었다. 간단히 돌아보고 나오자 블루모스크가 한눈에 보이는 사진 포인트도 있어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자연스럽게 블루 모스크로 향했다.
난생처음 방문한 모스크였는데 입구에서 복장에 대한 확인을 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는 J 씨는 익숙하게 미리 챙겨 온 숄을 두른다. 신발까지 벗고 인파에 밀려 들어가는데 내부도 대대적인 공사 중이다. 사실상 볼 수 있는 부분은 천장이 다라고 할 만큼 별로 없었다. 그에 비해서는 관광객은 상당히 많았는데 종교적인 이유 때문일까? 그래도 천장이나 구석구석 보이는 기둥의 모습은 이 모스크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중에 공사가 끝났을 때 꼭 다시 와봐야겠다.
모스크를 나서자 자연스럽게 먼발치로 아야 소피아가 보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아야 소피아로 향했다. 유적이 즐비한 이스탄불의 역사를 통틀어 말한다고 하더라도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바로 아야 소피아일 것이다. 6세기에 엄청 빠른 속도로 지었다고 하는데, 사실 겉으로 봐서는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건물일까 싶다.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통짜 석조 기둥이 입구부터 위압감을 뽐내는 판테온과는 달리 뭔가 벽돌을 덕지덕지 붙여서 지저분하게 쌓아 올린 듯한 느낌이라서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입구까지 도착했지만 역시나 사람이 꽤 많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입장했다.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왜 특별한지 이해가 안 되는 기분이었지만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본당 입구와 바깥문 사이의 일종의 회랑의 돌이 품질이 대단하다. 여러 가지 무늬석을 맞춰놓고 그 위를 화려한 금빛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해놓았다. 입이 쩍 벌어졌다. 알고 보니 지진이나 설계 실수로 인한 보수 공사를 많이 했고, 그때 주로 고강도 벽돌을 사용해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즉 덕지덕지 쌓여있는 듯한 벽돌은 수리를 위해서 말 그대로 나중에 임기응변으로 쌓아 올린 벽돌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기구한 운명의 상징이랄까? 들어갈 때 신발을 벗어야 했는데 블루 모스크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을 것 같아서 구석에 있는 신발장에 넣었다. 그렇게 비싼 신발도 아니고, 그래도 종교 시설인데, 훔쳐가진 않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본당에 들어가자 실내 공간이 너무 넓어서 거리 감각이 무뎌진다. 물론 예전에 베드로 대성당에서 느꼈던 감각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비슷한 느낌이었다. 화려한 무늬석을 짜 맞춰 쌓아 올린 벽, 천사의 모자이크화, 아마도 예수라서 가려놓은 듯한 천장의 금색 모자이크, 성화 스테인 글라스,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달아놓은 듯한 이슬람 서예 작품 판, 거대한 큐폴라, 낮게 깔려서 차분하게 비춰주는 전등까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슬람과 기독교, 유럽과 근동의 문화 요소들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조화롭게 어울려있다. 어쩌면 아야 소피아는 곡절 많은 이스탄불의 역사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이곳 역시 공사 중이라서 2층에는 올라가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2층에 많은 성화들이 있다고 하는데 블루모스크와 함께 꼭 다시 와야 할 장소가 되었다. 사실 여행 기간 중에도 기회가 되면 다시 오자고 J 씨와 이야기했는데 다음 날도 가볼 곳이 너무 많아서 결국 다시 올 기회는 없었다.
아야 소피아를 나오니 벌써 배가 고픈 시간이다. 예전에 한국인 여행 블로그에서 찾아둔 Buhara Kebab House라는 식당이 가깝길래 그쪽으로 향했다. 여기도 흰 빵을 궈서 내놓는 것을 보니 괜찮은 식당 같다. 여기 흰 빵은 구멍을 내서 부풀지 않게 구웠다. 아다나 케밥과 함께 주키치라는 호박전 비슷한 음식을 시켰는데, 요거트 소스와 함께 간장도 같이 나왔다. 간장을 찍어 먹으니 호박전이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나중에 터키인인 J 씨 친구에게 간장이 보통 나오냐고 물어봤는데 잘 안 먹는 소스라고 한다. 동아시아 관광객을 위해서 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곳에서는 디저트로 갈아놓은 견과류를 꿀에 재우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서 줬는데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자연스럽게 갈라타 다리를 향해서 걸었는데, 가는 길이 바로 그랜드 바자였다. 줄지어서 끝없이 옷과 잡화를 파는 가게가 이어진다. 글씨를 전부 한글로 바꾸고 인종적 차이만 무시하면 남대문이었다. 아니 그냥 자세히 보지 않으면 남대문이었다. 사람의 흐름을 따라서 천천히 갈라타 다리로 향해 가는데 실내 상점이 보였다. 가방까지 검사하고 들어가는데 여기가 스파이스 마켓이라고 한다. 터키 과자와 기념품 등이 줄지어 있지만 흥정에 약한 우리는 물건을 구매할 생각은 딱히 하지 못하고 구경만 많이 했다.
향료 시장을 나서자 바로 앞 골든혼을 건너는 갈라타 다리가 보인다. 이미 꽤 걸어서 다리를 아끼는 차원에서 한정거장이지만 트램을 타고 이동했다. 트램 역에 내리자 길을 찾을 것도 없이 사람들을 따라가니 갈라타 타워로 올라가는 길이다. 기온도 별로 높지 않고 바람도 많이 불지만 역시 햇볕과 언덕에 땀이 흐른다. 올라가는 언덕 주변에는 낙원상가 같이 악기나 앰프를 파는 가게가 많이 보인다. 갈라타 타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입장에 시간이 오래 걸리나 걱정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티켓을 구매하는 줄이다 뮤지엄 패스 덕에 바로 입장 줄로 가니 얼마 기다리지 않고 타워로 올라갈 수 있었다. 타워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볼만 했다. 청명한 하늘에 공기도 맑아서 멀리까지 잘 보였다.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편의 아시아지구와 금각만 건너편의 역사지구를 골고루 살펴볼 수 있었다. 타워 테라스를 한 바퀴 돌면서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한 아저씨가 DSLR을 들고 사진을 찍다가 우리가 지나가니 사진을 찍어준다고 한다. 전화기를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멋진 사진을 찍어주신다. 짧은 사이에 포트레이트 모드에 광각까지 번갈아가며 여러 장을 찍어주셨다. 아마 취미 삼아서 관광객에게 인생 샷을 선물해주는 것 같다.
갈라타 타워를 내려오자 카페 거리가 있는데 인파가 상당하다. 구시가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잘 꾸민 사람들과 관광객이 가득한 거리를 천천히 내려왔다. 다음은 어디로 가볼까 했는데, 지하철을 타면 바로 탁심광장으로 갈 수 있었다. 저녁엔 이 갈라타 타워 부근에서 J 씨 친구를 만나기로 했으니 탁심 광장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카페 등지에서 잠깐 쉬고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탁심광장도 많은 인파로 축제 분위기였다. 저렴한 스타벅스에서 잠시 쉬고 화장실을 해결한 후 산책에 나섰다. 탁심광장에서 갈라타까지 이어지는 길이 이스탄불에서는 가장 인파가 많은 길이라고 한다. 매 주말 수십만 명이 지나간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만한 인파다. 차가 다니지 않는 보행자 전용 큰길이 있다. 좌우로 대형 상점과 식당이 줄지어 있는 것이 상해나 베이징의 중심가가 떠올랐다. 사실 반대로 여길 벤치 마크해서 상해나 베이징의 그 거리를 만들었겠지만 말이다. 인파 사이로 지나다니는 빨간 트램이 귀엽다. 아마 관광용으로 운영하는 것 같은데 빠르게 둘러보려면 한번 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옷가게 한 번 서점 한번 성당 한 번 발걸음 닿는 대로 구경하면서 천천히 걷다 보니 J 씨 친구를 만날 시간에 딱 맞춰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인형 같은 친구라고 했는데 역시나 인형 같은 모습이다. 대학시절 제일 친한 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음료를 사는 게 아니라 경치를 사는 거라고 강조했던 루프탑 바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둘이 정말 쉼 없이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영어가 부족해서 좀 따라가기가 벅찼다. 많은 부분은 문장 자체는 하나하나 다 들리는데 너무 빨리 흘러가서 이해하기 전에 넘어가버리는 식이었다. 똑똑하고 아는 게 많고 쉴 새 없이 떠드는 게 대부분의 J 씨의 대학 친구들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서 J 씨는 똑똑하고 아는 게 많은데도 말을 아끼는 편인데 어쩌면 말을 아끼는 편인 J 씨라서 그들에게 더 환영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현지인의 안내가 없었다면 절대 가 볼일이 없는 식당이었을 것이다. 아르메니안 식당이라고 하는데 주택가 구석으로 들어가서 있는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이다. 청담이나 압구정 구석에 있는 레스토랑 느낌이었다. 주문했던 라크라는 술이 특이했는데, 원래는 투명한데 물을 부으면 탁해진다. 아마 물속에 있는 염류와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45도이고 더블샷 혹은 싱글 샷으로 작은 맥주잔에 넣고 물로 희석시켜 먹었다. 세 명이라 작은 병으로 할지 큰 병으로 할지 고민하다 큰 병으로 했는데 거의 다 비운 덕에 우리 세 명 모두 과음하고 말았다.
소량의 음식을 타파스 스타일로 다양하게 주문할 수 있는 식당이었는데, 스무 개 이상의 메뉴를 시켜서 다양한 진미를 먹어보았다. 보통은 길거리 음식으로 먹게 된다는 돌마(홍합 리조또)와 디저트로 먹었던 멜론에 치즈를 얹어먹었던 음식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 식당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해주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할아버지의 생일 케잌까지 받아먹었다. 그 할아버지는 심지어 그 식당 직원도 아닌데 케이크를 나눠주는 것도 재미있게 보였다. 우리 테이블을 서빙해주던 웨이터는 백발을 장발로 기르고 뿔테 안경을 쓴 할아버지였는데 표정만으로도 친절함이 느껴지는 노련한 분이라 술자리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니까 주로 듣는 편이었는데 J 씨의 대학 생활 일화들을 들을 수 있었다. 더불어 J 씨가 내게 해주었던 이야기에 있던 오류들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다만 내가 있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100프로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진 않아서 조금은 미안했다.
6시경에 만나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11시가 넘어버렸다.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 된 것이다. 식당 앞에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니 12시가 거의 다 되었다. 호텔 앞은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유명한 곳이라는데, 밤이 늦으니 역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여기저기 라이브 음악을 연주하는 작은 밴드들이 흥을 돋우고 있다. 기분 좋게 호텔로 돌아와서 새로운 방을 확인했다. 신경 썼다고 하면서 가장 높은 층의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과를 하는데 이번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쉽게도 오늘은 말 그대로 잠만 자고 나가게 생겼다. 하루 종일을 돌아보면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한 하루였지만 세심하게 배려한 관광 코스를 돌고 온 듯이 아다리가 딱딱 맞는 경험이었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빨리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