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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Nov 23. 2022

유서 쓰기

살기 위한 선택

노란색 물감을 쓰면서 가족사진 속 나 자신도 다시 그려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이런 말은 하지 마세요.’라는 설명서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말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가족들의 마음을 바라보는 글을 쓰다 보니 어제와는 조금 다른, 어제보다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는 선택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별하고 나서야 진정 그 누구도 모르는 때에 죽음이 찾아올 수 있으며, 지금 마주 보고 웃는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저는 유서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여전히 억울하고, 분하고, 답답하고, 슬프지만 살아가야 하는 날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내일 죽는다면’을 가정하고 써보려 했지만, 죽음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쓴 글입니다.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하기 위한 결정입니다. 이 글은 죽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선택입니다.


가끔이라도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면, 모두가 편안히 잠드는 장면을 상상하겠지요. 저 또한 그런 죽음을 그려보지만, 제 그림과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습니다. 가족들에게 인사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마지막이 어떠한 모습이든 간에 제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이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갑작스럽거나 혹은 예견된 죽음이라 할지라도 이별은 가슴 아프고 힘든 과정입니다. 하지만 너무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나의 생전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살다 갔네.’ ‘참 좋은 면을 갖고 있었어.’라고 이야기 나누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움과 슬픔을 숨기지는 말고, 제 사진 앞에서 다 털어놓고 가셨으면 합니다. 아프더라도 살아가려 힘쓰는 당신의 하루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모든 색을 무지개처럼 그려내고 싶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사랑받고자 최선을 다했고, 늘 미성숙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도 주고, 받으며 자랐습니다. 20대가 되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20대 때도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여전히 타인에게 사랑받고자 불안정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시 기독교가 매우 큰 동아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 저의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하나님을 원망했고, 여전히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가?’에 대한 난제가 남아있지만, 최근 어떠한 계기 없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말자 했습니다. 그동안 삶의 중요한 가치였던 종교는 치료를 위해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교회는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17년간 대부분을 교회에서 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에서야 어린아이의 모습인 나를 만나고, 가족들과 제주를 여행해서 좋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책임감 없는 사람은 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저의 열정은 성실함을 채우려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나아가서는 자신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을 포함해서 잠시 만나는 사람에게도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한순간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함으로 남아있길 바랍니다.


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려줘서 고맙습니다. 보고 싶다고 말해줘서 감사합니다.     


나를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저를 생각하면 따뜻해지고, 미소 짓게 되고, 보고 싶어지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제가 겪은 아픈 일로 인해서 걱정만 끼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나마 당신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걱정하게 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미안합니다.     

아이를 생각하니, 죽음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아이가 감당해야 할 슬픔과 그리움을 어찌 덜어줄 수 있을까요. 아직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고, 엄마의 존재가 가장 클 텐데 아이가 또 다른 가족이 생기고, 제가 늙어서 아이의 삶에 짐이 될 때 이별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옆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자 친구가 되어주고 싶습니다. 아이를 생각할수록 삶에 미련이 생깁니다. 제발. 시아와는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시아야. 엄마의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네가 행복하고, 건강하고, 안전하면 엄마는 그저 좋아. 물론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어려움을 만날 거야. 그럴 때마다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나면서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곧 이겨낼 너를 칭찬해. 잘했어. 후회가 없는 선택을 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니 네 마음의 소리를 잘 들으면서, 선택하지 않아서 후회하지는 말았으면 해.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감과 인내심을 가지렴. 꿈이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보렴. 너를 사랑해주는 좋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꼭 소개해주렴. 말이 길어질수록 잔소리가 되는 느낌이야. 결론은 네가 내일도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길. 미소 지으며 잠들 수 있길. 엄마는 언제나 너의 삶을 응원해. 정말 많이 사랑한다. 이별을 견디게 해서 미안해. 살아줘서 고마워. 또 또 사랑해.      


남편을 생각하니, 불쌍하고 안쓰럽습니다. 너무나 미안합니다. 이미 아이와 엄마를 함께 잃었기에, 또 다른 상실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수시로 짜증을 부리던 일이 미안합니다. 한 번씩 남편에게 “내가 먼저 죽으면 일상을 더 열심히 살고, 꼭 다른 사람 만나.”라고 말했었는데, 여전히 그 마음은 진심입니다. 남겨져 삶을 살아야 하는 남편이 저로 인해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프고 힘들겠지만 살아야 하기에 시아와 함께,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전혀 서운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꼭 말해야겠습니다.      


여보. 그동안 내 옆에서 살아줘서 고마웠어요. 우리가 같은 날 함께 수아를 만나러 간다면 큰 복이겠지만, 제가 먼저 가게 되었다면 미안해요.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고통을 또 느끼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평생을 사랑하기로 약속했는데, 가까운 사이라고 배려하지 못했던 일 다 용서하세요. 그리고 저에게 너무 미안해하지 마요. 저는 즐거웠던 일들만 기억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니, 제가 겪은 아픔을 부모님이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에 무겁습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외로운 어린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다 내려두었습니다. 여전히 부모님께 사랑받고 싶은 어린 아이라 죄송하고 효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주고받은 상처는 참 오래 자국이 남지요. 제가 드린 상처들 모두 죄송합니다. 저에게 못해줬다 후회하시는 일들 다 지워버리시고, 그저 좋았던 기억만 남기기로 해요. 엄마, 아빠의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제 삶의 많은 순간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시아버지, 가족들 생각뿐인 시누이, 제 걱정으로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할머니, 고모들, 친척들, 힘든 이야기 다 들어주는 친구들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어준 이웃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일일이 남기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제가 살았고, 여러분의 마음에는 여전히 제가 존재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이제 수아를 만난다는 사실에 설렙니다. 보고 싶은 수아를 보고, 못다 한 이야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안아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못 해준 사랑 다 해주고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죽으면 꼭 수아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저를 꼭 수아 옆자리에 묻어주세요.     

 

여전히 죽음이 두렵지만, 눈앞에 죽음이 찾아올 때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아쉬운 마음, 보고 싶은 얼굴, 하고 싶은 말들이 여전히 머릿속을 채우지만, 생명의 끝을 막을 길은 없으니까요. 저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으로 여러분의 마음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길 바라며. 하늘에서는 최대한 늦게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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