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스트레스 때문에 뒷골이 땅기고 어깨가 아프다는 말을 하며 출근하는 나에게 딸이 인형 하나를 내민다. 연한 병아리색 앙징맞은 크기의 인형이다. 손으로 만질 때 촉감이 말랑말랑해서 기분 전환이 될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볼은 발그레하고 활짝 웃는 표정과 까만 콧방울이 귀엽다. 가슴팍에는 초록 나뭇잎 두장을 끼우고 있는 모양새가 곱다. 이내 '너무 귀엽네'라는 말과 동시에 인형을 받아 핸드백에 넣었다. 그날부터 작은 인형은 내 사무실 한편에 자리에 앉아 나와 함께 근무 중이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 그 아이를 만지작 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자료를 읽을 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게 눌러놓는 용도로도 쓰인다.
이외에도 내 자리를 지키는 물건 중에는 걱정인형도 있다. 모니터 앞에서 나를 지키고 있는 그녀는 뽀글뽀글 파마머리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었다. 그녀가 내 걱정을 해결해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지켜보며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걱정인형은 옛 마야 문명의 발상지인 중부 아메리카의 과테말라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인형이다. 아이가 걱정이나 공포로 잠들지 못할 때 부모들이 작은 천 가방이나 나무상자에 작은 인형을 넣어 선물해 줬다고 한다. 걱정인형은 잠들기 전에 인형에게 걱정을 이야기하고 머리맡에 두고 자면 걱정을 대신해 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잠투정을 할 때마다 꼭 찾는 이불이 있었다. 갓난아기 때 덮던 이불이 자주 빨아서 모서리가 다 해져서 실밥이 터져 나올 즈음이 되었을 때까지 그 습관은 계속되었다. 손가락으로 삐져나온 실밥을 돌돌 말면서 투정을 부리다가 잠들곤 했다. 그 행태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까지 지속되었다. 덕분에 1박으로 가족 여행을 갈 때도 이불을 꼭 챙겨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오래되고 낡은 이불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기 암시의 일종이다. 그 사물을 통해 주문을 걸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안정이나 위로를 찾는 것이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내 경험을 비추어보면 별거 아닌 듯 여겨지는 생각이나 암시가 일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중요한 발표나 공연이 있는 날 아침, 양치질을 하는데 컵을 놓쳐서 떨어뜨리거나 예기치 못한 실수를 하면 그날따라 마음이 불안해지고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오늘 일이 잘 안 되려는 불길한 징조인가 여기게 되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불안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버벅대거나 까먹는 작은 실수를 했던 경험이 있다.
요즘 나를 지키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바로 가끔 찾는 산사에서 구입한 보라색 팔찌이다. 특별한 글귀가 새겨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착용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엇이든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든든해진다. 그 덕분에 두어 개 있는 금팔찌는 늘 화장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날이 많다.
일체유심조라고 했던가.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마음이 내 맘대로 컨트롤되지 않는 날이 여전히 많다. 그럼에도 늘 주문을 걸곤 하는데 그러면 신기하게 100퍼센트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평타 정도는 기록했던 경험치를 믿는 탓이다. 그러고 보면 정작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내가 나를 믿는 마음, 조금 부족하지만 열심히 노력한 만큼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아닐까.
얼마 전 한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던 걱정인형을 사무실 직원에게 선물했다. 맘과 달리 늘 불안감 때문에 애를 먹는다는 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건네주었다. 어쩌면 유치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의 불안과 초조를 달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그리고 어느 날 쯤에는 인형이 없어도 그의 마음이 초조와 긴장상태를 떨쳐버리기를 또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