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기본! 무조건 따라 하자!
행복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 존재를 초월하여 타인에게 봉사할 때 온다."
"True happiness comes from transcending your own being to serve others."
- 달라이 라마 (Dalai Lama)
종교의 역설, 혹은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달라이 라마는 그런 말을 했다. 진정한 행복은 나 자신을 넘어 타인에게 봉사할 때 온다. 그 ‘봉사’라는 것이 말이 가끔은 그 뜻이 흐릿해질 때가 있어서 씁쓸하다. 봉사라는 이름 아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분 중에 여든이 넘은 노부부가 있었다. 참, 물질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풍요롭게 사는 분들이었다. 몸은 좀 불편했지만, 그래도 슬하에 의사, 변호사처럼 성공한 자녀를 다섯이나 두었으니, 겉으로 보기엔 부러울 게 없는 삶이었다. 그 자녀들마다 신념이 달랐다. 기독교 신자 둘, 천주교 신자 둘, 그리고 한 명은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이 부모님은 참 대단하게도, 자녀들 집에 머물 때마다 그들의 종교에 맞춰 교회나 성당을 찾아가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다. 종교를 떠나 가족의 화합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환으로 몸져눕게 되자,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지극정성으로 돌본 사람이 누구였을까? 종교적 믿음이 강하다고 자부하던 아들과 며느리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신론자라고 말하던 아들과 그 며느리였다. 그들은 종교라는 거창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부모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헌신하였다. 그러나 한 분이 돌아가신 후 벌어진 재산 다툼 이야기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종교의 숭고한 가치가, 현실의 탐욕 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씁쓸한 풍경이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가슴이 아프다.
말뿐인 믿음의 한계
주변을 보면, 가족이나 친척보다 종교 활동에 더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 교회나 성당에서 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남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니, 사람들은 흔히 “아, 저 사람은 집에서도 부모님을 훌륭하게 모실 거야” 하고 짐작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다. 아픈 부모님 병문안 한번 제대로 가지 않으면서, 생신도 잊어버리면서도,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거액의 헌금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효자’ 또는 ‘효부’라고 칭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종교가 굳이 전도나 포교 활동으로 신자를 늘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반인보다 더 큰 사랑과 헌신으로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인다면, 그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증가하고 교인 수도 저절로 늘어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으니, 이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신을 믿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을,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시작, 가장 가까운 곳에서
종교적인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의 첫 번째 실천 대상은 바로 가족이어야 하지 않는가? 종교 기관에 거액의 헌금을 하기 전에, 부모님, 자녀, 형제자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조카, 삼촌 등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금전적인 도움을 주거나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의미와 감동을 가져다줄 것이다. 옛말처럼 ‘자신의 자식에게 하는 것의 10분의 1만해도 효자’라는 말이 있듯, 가까운 이들에게 조금만 베풀어도 정말 훌륭한 자손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특히 연로하신 분들께는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 어린 관심,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 자체가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자라면서 어른들의 한없는 사랑과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고 성장하였다. 특히 가족들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조건 없는 사랑과 도움을 주었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고, 나의 부모님이 그랬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의 할아버지는 손자가 태어나자마자 20년간 학비용 보험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제 그분들은 점점 나이 들고 건강도 안 좋아지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나는 내 자식에게 늘 가르친다. 그분들을 잊지 말고, 먼저 찾아가 안부를 묻고 감사 인사를 전하며, 작은 선물과 용돈을 드리라고. 그분들이 경제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다. 그런 따뜻한 인사를 받으신 그분들은 너의 작은 마음에도 큰 행복을 느끼고 진심으로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전하는 진심 어린 사랑과 기도는 자식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치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도 변함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실천 없는 믿음의 허위
예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던 한 부목사님이 있었다. 그는 청년 성경 공부 시간에 종교학의 본질과 기독교의 약점에 대해 매우 솔직하고 용기 있게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담임목사님은 그의 행보가 교회의 권위를 해칠 수 있다며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부목사님은 기독교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고쳐 나가야만 진정한 믿음이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솔한 이야기는 많은 교인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고,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특히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그의 말이 있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봉사와 사랑의 정신으로 헌혈을 한다면, 환자를 위한 피가 부족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거나 사후 신체 일부를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한다면,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줄어들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신자들이 이들의 선한 행동을 따른다면, 세상은 악인이 없는 진정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말은 종교인들의 실천적인 삶에 대한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종교 지도자들이 희생과 봉사를 열렬히 설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헌혈이나 장기 기증 같은 직접적인 실천에 나서지 않는 모습은 모순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자기 희생이 수반되지 않은 종교인의 가르침은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
돈으로 천국에 가는 길?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종교인보다 그 외의 다른 목적, 이를테면 명예나 권력, 재물을 좇는 종교인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와 불교에서 파생된 종파만 해도 수백, 수천 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전을 해석하며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강변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돈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비합리적인 주장을 맹신하고 따르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면죄부 판매처럼, 종교를 통해 물질적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으니, 어쩌면 놀랄 일도 아닐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말처럼 헌혈을 하거나, 장기를 기증하거나, 사후 신체 일부라도 기증할 서약을 한다면 세상은 분명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 선한 행동을 따를 것이고, 인류 모두가 감동하여 폭력, 전쟁, 종교 분쟁 등이 사라지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유명 종교인들조차도 희생과 봉사에 대한 설교는 열심이지만, 정작 자신의 몸에 조금이라도 희생이 따르는 일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헌혈이나 장기 기증 비율은 일반인보다 오히려 적을 수도 있다. 자신은 헌혈조차 하지 않으면서 신자에게는 헌혈을 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엄청난 난센스이다.
종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진실한 종교라면 그 지도자들의 행동, 특히 희생적인 봉사 정신의 실천 여부를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금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으면서 '신앙심'을 운운할 때, 그들에게서는 마치 사기꾼의 언변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회에 헌금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목사도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그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다양한 헌금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신자들의 순수한 헌금으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순수한 헌신을 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로만 봉사를 외치는 종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실 속에서 찾은 깨달음
내가 아는 신학대학 친구는 천주교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종교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큰 혼란을 겪었다고 했다. 대학교에서 불교를 전공하던 다른 친구는 산속 절에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살찐 스님들의 모습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청빈의 가르침과 현실 속 스님들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내와 함께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마다 같은 동네의 다른 교회나 다른 종단에 대해 '사이비' 운운하며 서로를 힐난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진정으로 존경하고 싶은 목회자를 만나기 위해 여러 교회를 전전하다가, 결국 집 근처의 교회에 정착해야 했다. 다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신론자가 되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원한다면, 종교는 분명 개인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마음의 평화, 도덕적 지침, 공동체 의식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를 믿는 것과 종교에 '빠져 미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나친 맹목적인 믿음은 '종교의 탈을 쓴 사기꾼' 집단에 빠지게 만들 위험이 있다.
달라이 라마는 이런 말을 했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은 각자의 성향이 다르고 근기가 다름을 알아 다양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는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핵심 가치인 상호 존중을 실천해야 함을 역설하는 말이다. 진정한 종교는 타 종교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랑과 연민을 바탕으로 모든 생명을 포용하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이웃과 사회,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다
결국, 우리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도움을 주면, 이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 가족 공동체와 사회 전체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나는 미국에서 살 때 많은 미국인들이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집 문 앞에 선물을 놓아두는 것을 보았다. 그 선물들은 우체부, 미화원, 경비원, 택배 기사 등 매일 보거나 가끔 보게 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작은 친절의 행동은 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익명으로 베푸는 친절은 받는 사람에게도, 주는 사람에게도 순수한 기쁨을 선사한다.
내 주변에도 늘 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해주는 많은 이웃들이 있다. 아파트 건물 관리 직원들, 택배 기사들, 동네 버스 기사들, 마트 직원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새긴다. 예를 들어, 택배 기사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건네거나, 아파트 경비원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작은 행동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서로의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공유하며 행복해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답을 받는 셈이지만, 때로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거나 크게 도움을 줄 때도 많다. 이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쌓는 행위와 같다. 보이지 않는 친절의 씨앗이 언젠가 거대한 신뢰의 숲을 이루는 것이다.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과 지지가 있었다는 것과 같다. 친절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직접 실천해 본 사람만이 아는 진리이다. 내가 친절하면 상대방도 나를 친절하게 대한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단순히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다. 바라지 않아도 세상의 이치가 결국 보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사회 전체를 행복하게 만들고,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 모두에게 만족감과 유대감을 선사한다. 우리 주변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서로에게 '정(情)'과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이다. 이는 더 좋은 이웃과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근간이 된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의무가 아닌,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지혜이자 행복의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