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버티고 있어 줄래요?(6)
불안장애의 연애기 6
이 길의 끝에 도착할 땐 난 어떤 결정이라도 내려야 했다.
이미 수많은 생각을 했고 Yes or No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선택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할지였다. 이 길의 끝에 도착하면 난 또 다른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그때 답을 준다고 해야겠다.'
그의 제안을 승낙하면 '사귀는 기념으로'라는 좋은 핑계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거절하면 집으로 가는 동안 내 약점을 이용해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의 모습으로는 나에게 위협을 가할 시그널은 보이지 않았지만, 밤 9시에 넘은 시간,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아무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가다 보니 어느덧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나의 대답을 듣고 싶다는 몸짓으로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 왔는데..."
"음, 미안해요.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요. 저한테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만큼 신중한 일이거든요. 필중 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우리가 알게 된 게 평범하진 않으니까. 더 신중하게 되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가죠. 아민 씨 집이 꽤 머니까 집까지 데려다 드리는 건 괜찮을까요?"
지하철 이용이 힘들어 버스만 타는 난, 이곳에서 집까지 적어도 1시간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그의 차를 타고 가면 그 절반은 줄일 수 있었다. 난 휴대폰을 꺼내 위치서비스와 SOS 서비스 설정이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민 씨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좀 긴장했었는지 하하. 차에 히터 틀어줄 테니까 차에 타고 있어요. 금방 올게요."
그는 차문을 열고는 안으로 손짓했다. 나는 흙이 묻은 신발을 맞닿게 하여 탁탁 털고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켜고 약하게 히터를 틀었다. 따뜻한 바람이 발아래로 느껴졌다.
"다녀올게요."
그가 화장실 쪽으로 가는 걸 보고서는 창문을 조금 열고 주변을 둘러보며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만약을 위해 차 안을 수색(?)하기로 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곳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선바이저를 살펴보고 콘솔박스도 열어봤다. 차주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이런 행동을 한다는 건 결코 용납되지 않지만, 도덕성이고 뭐고 일단 내가 살고 볼 일이었다. 글로브 박스와 의자 밑까지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내비게이션의 목적지까지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됐다. 트렁크는 차를 타기 전에 이미 곁눈질로 살펴봤기에 수색 목록에서 생략했다. 그의 차에서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콘솔박스에서 본 부적은 좀 궁금했다.
어둠 속에서 그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얼른 차문을 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화장실 가까웠어요?"
"네, 우리가 지났던 길에 있었어요. 혹시 화장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집으로 가는 동안 특별한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차 안 수색에서 특별한 점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가 풍기는 나른하고 푸근한 분위기도 한몫한 것 같았다. 차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과 색색으로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고 있자니 줄곧 회색빛으로만 살았던 내 인생이 조금 허무해졌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나는 그에게 그가 없을 때 했던 내 행동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필중 씨, 미안해요."
"뭐가요?"
"필중 씨 화장실 가 있는 동안 차 안을 좀 살펴봤어요."
"아..."
운전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작게 탄식했다. 아무리 나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라도 허락 없이 자기 차를 뒤져봤다는 건 기분이 나쁠만했다.
"뭐든 확인해봐야 한다고 했으니까 이해해요. 그래서 신경 쓰이는 게 있었어요?"
"아니요. 그냥 그... 부적이 있던데 그건 뭐예요?"
다행히 크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난 이 틈을 타 부적에 관해 물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적합한 결혼상대를 만나기 위해 부적을 쓰기도 한다니까 그런 쪽의 부적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희 어머니가 사고 나지 말라고 넣어놓은 부적이에요. 매년마다 가는 점집이 있는데 믿지 말라고 해도 그래야 마음이 놓이시는지 가끔 차에 타실 때마다 확인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그냥 넣어놓고 있어요."
하긴 내 휴대폰 속에도 이와 비슷한 물건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타로카드이다. 우울증을 겪던 시절, 뭐라도 해보고자 구청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원의 타로카드 강의를 신청했고 일주일에 3일씩 카드를 배우면서 내 속마음이나 내 현상태에 대해 탐구했다. 그래서 그런지 카드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카드를 갖고 다니게 됐고 알게 모르게 힘이 나는 듯했다. 그의 어머니가 주신 부적도 그런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아들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
"필중 씨 어머니가 참 많이 아끼시나 보네요."
"글쎄요. 저는 그런 미신을 잘 안 믿어서 그런지 부적 써올 때 몇십 만원씩 준다니까 좀 아깝게 느껴져요. 그 돈으로 그냥 맛있는 거나 사드시지 싶어요. 혹시 아민 씨 미신 믿으세요?"
"이것도 미신인가? 저 타로카드를 배워서 조금씩 활용하고 있어요. 맹렬히 믿는다기보다는 심적 안정감을 위해서 보는 것 같아요. 신점이나 부적은 한 번도 안 써봤지만 제 휴대폰 케이스 안에 카드 한 장은 들어있거든요."
"아 타로카드~ 친구 따라서 재미 삼아 딱 한번 봤는데 잘 안 맞더라고요. 그리고 미리 걱정해봤자 뭐가 좋은가 싶어요. 제 좌우명이 흐르는 대로 살자거든요."
"흐르는 대로 살자요?"
"네 제가 딱히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본 적은 없어요. 흘러가는 대로 정해진대로 그냥 맡기는 편이죠. 그래서 걱정이나 스트레스받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잘되면 잘되는 대로 안되면 안 되는대로 또 그다음이 있겠죠. 처음엔 아민 씨가 SNS로 말하는 것들이 이해가 안 됐거든요.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어내신다고 할까? 조금 편하게 생각했으면 했어요."
흘러가는 대로라... 그의 말에 순간 짜증이 났다. 나도 안다. 내 성격이 나 스스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냥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내버려 두기보다 불안요소나 위험요소를 제거하면서 있는 힘껏 인생을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 과정에서 물론 힘들고 스트레스는 받겠지.
연애를 하게 된다면 그런 인생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했다. 인생을 치열하게 열정적이게 개혁적이게 살면서 그 안에 생겨나는 생각들을 나누면서.
나도 편하게 살고 싶다. 아무 걱정 없이 그가 말하는 정해진대로 순리대로 살아가는 거? 나도 하고 싶다. 그러기엔 내 눈으로 확인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앞으로 닥쳐올 상황들을 아무 준비 없이 맞는다는 건 내 인생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말이 내 고민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와 함께하기엔 인생 가치관부터 달랐다. 모든 걸 확인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나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인생을 맡겨두는 그와의 연애는 순조롭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 이상 긴장되지도 설레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저랑 완전 반대네요. 전 흘러가는 대로 저를 두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살아온 시간이 아깝고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지루할 것 같아요.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만든다는 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스트레스도 받고 힘들긴 하죠. 그래도, 그래도 전 이렇게 사는 게 더 저 다운 것 같아요."
이 정도면 확실하게 Yes or No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입꼬리를 한가득 올리며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약간은 궁금했지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내가 사는 동네로 차가 들어섰다.
"아민 씨 집이 어디예요? 그 앞에 세워드릴게요."
"아니에요. 저기 시장 입구에 세워주세요."
"집이 시장통 안에 있어요?"
"음, 그건 아니지만 아직 집을 알려드리기는 좀 그래서."
"아, 그래도 어두운데..."
그는 시장 입구와 도로 건너편을 살펴보면서 내가 살법한 곳을 찾아보는 듯했다. 회사가 밀집한 곳이라 식당이나 회사 건물 말고는 아파트나 주택은 보이지 않아 그는 긴가민가했다.
"여기 근처에 사시는 거예요? 아니면 조금 더 가야 하는 거예요? 걱정돼서 그래요. 집 앞까지 가요."
나는 안전벤트를 풀면서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여기서 세워주세요. 여기서 얼마 안 걸려요."
그는 안전벨트까지 풀면서 말하는 나를 쳐다보더니 살짝 한숨을 쉬며 시장 입구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주변이 어두컴컴한 게 칼을 휘두르는 조선족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실 이 시간에 시장을 와본 적이 없어서 조금 무섭긴 했다.
"음, 아민 씨 대답은요?"
"사실 아까 필중 씨가 한 말이 좀 걸렸어요. 저는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래서 필중 씨랑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시작한다고 해도 이런 걸로 많이 다툴 거고 그러다 보면 다른 연인들처럼 금방 헤어질 거예요. 헤어짐이 뻔히 보이는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기엔 우리 나이도 있고 시간도 아까워요."
나의 말에 그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거운 침묵이 답답해 얼른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가방을 쥐고 문을 열려고 할 때 그는 입을 열었다.
"저는 그래서 잘 맞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아민 씨가 저랑 만나는 동안에는 스트레스받는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자잘한 문제로 다투기는 하겠죠. 하지만 저는 아민 씨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래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아민 씨는 아민 씨답게 살면 돼요."
"그러다가 부딪히면요? 분명 답답해질 텐데 그럴 때는요?"
"답답해하면 되죠. 이야기하고 풀면 되죠. 지금 까지처럼요. 저랑 아민 씨는 적어도 서로한테 숨기는 건 없잖아요. 그거면 된 거죠. 누가 알아요. 아민 씨랑 저랑 결혼까지 하게 될지."
그의 말이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나랑 똑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연애한다고 해서 내가 힘들지 않을까? 오히려 힘듦이 배가 되지 않을까? 그의 말대로 그와 연락하고 만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불안하긴 했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있을 때는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나의 무례한 요구에도 거리낌 없이 응했고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 더한 것도 보여주었다. 그저 내가 원하니까.
"제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요? 꽃뱀처럼 필중 씨 돈 다 뺏어먹고 튀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것도 뭐 제 운명이겠죠. 그런데 아민 씨는 그럴 분 같아 보이진 않아요."
나를 보며 싱긋 웃는 그의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어쩌면 그만의 확신이 아니었을까?
내 결심이 흔들렸다. 작고 큰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어쩌면 잘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불안해하면 그는 말없이 나를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 지나가는 일이라고 시간에 맡기고 나 자신을 믿으라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난 이물질을 다시금 제자리로 넣어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를 만남으로써 내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넉넉하게, 뾰족했던 가시들이 둥글둥글하게, 그러면 내가 날 공격하는 일도 조금씩 줄어들지 않을까.......?
"네, 만나봐요 우리."
어쩌면 내가 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평생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가 말한 것처럼 그것 또한 내 운명일 것이다.
적어도 그는 나를 속이려 들지 않았고 자신의 말에 확신이 있었다.
첫 만남에 자신의 자산까지 모조리 보여준 사람을 굳이 지금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달팽이가 잎을 갉아먹듯 그를 알아봐야겠다. 나는 '그'라는 새로운 탐구 거리를 찾았다.
- 불안장애의 연애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