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라 착각한 순간의 파문
그 무렵의 나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모두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 회의실 유리 벽에 비친 얼굴은 예전보다 흐릿했고, 그 흐릿함이 시력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남들이 내는 출력물은 점점 더 빠르고 정교해졌고, AI 도구들은 밤새 수백 가지 버전을 쏟아냈다. 나는 그중 가장 ‘덜 나쁜’ 결과를 골라 방향만 잡아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때는 내가 주도하던 회의였는데, 어느새 회의는 나를 지나쳐 흘러가는 듯했다. 아이디어가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이는 동안, 나는 가끔씩 자리에서 반 박자 늦게 끼어드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제발 나만 느꼈기를 바라며. 그 작은 시간차가 고스란히 나의 나이가 되어 돌아오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 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을 떠올렸다. 나는 아직도 이 팀에서 의미 있는 사람일까? 그러나 그 질문의 끝까지 따라가 보면 마음이 더 흔들릴 것 같아서, 늘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접어 두었다. 물론 이와 동시에 묘한 자신감도 공존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 알 수가 없다.
사람은 위협이 다가오기 전부터 미묘한 징후를 감지한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공기의 결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즈음 회사 분위기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흔들림을 품고 있었다. 폭풍전야라 하지 않던가. 고요함엔 이유가 있다. 소곤소곤 수군수군. 어느 오후에는 후배가 건넨 시안을 보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선배, 이건 모델이 뽑은 샘플이에요.
급하게 만든 건데… 그래도 참고는 되실 거예요.
그 말투는 배려였지만, 그 배려 속에서 나는 묘한 고립감을 느꼈다. 기술이 빠르게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 빠름이 사람 사이의 온기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낯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며칠 동안은 되레 숨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후배가 가져온 샘플을 다시 뜯어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직은 내가 더 볼 수 있는 게 있고, 더 판단할 수 있는 구석이 남아 있다는 착각. 어떤 빈 틈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이 또렷이 떠오른다는 사실이, 마치 내 자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회의 중에도 몇 번은 내가 던진 말에 후배들의 시선이 잠시 멈췄고, 그 짧은 정적이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아직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구나. 아직은 쉽게 밀려나지는 않겠구나.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과한 점수를 주며 하루를 버텼다. 그 자신감이 진짜인지, 아니면 급하게 주워 담은 착각인지 굳이 구분하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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