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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민수 Dec 10. 2022

나를 움직이는 중요한 힘

선택의 기로에서 '진짜'로 통하는 길

22.12.20 업데이트 

지하철 역사에 걸려있는 풍경소리를 평소에도 잘 읽어보는 편이다.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니 내용 그대로를 더 보려고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의 결이 나와 나란하다고 느꼈다. 짧게 함축된 글의 힘을 느껴보자.

지하철 역사의 '풍경소리'


22.12.29 업데이트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풀고 있어 흥미롭게 느꼈다.

글 읽기가 귀찮다면 한 번 시청해봐도 좋을 것 같다.

유튜버 '뉴욕주민'이 말하는 동기부여의 역설




이 글은 내 생각의 가지 하나를 통째로 베어다 꺼내놓은 결과다. 살아가면서 하게 될 여러 선택은 물론, 멘토링을 할 때에도 두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생각이기도 하다. 세 덩어리의 포스트로 글을 쪼개려다가, 읽을 누군가의 경험보다는 전체 흐름을 더 중히 여기기로 하면서 그냥 두었기에 길어졌다.




질문이라는 프레임 


A가 나을까? B가 좋을까? C도 괜찮은데...

가장 전형적인 고민의 패턴 중 하나일 것이다. 점심메뉴는 물론, 학교나 회사 선택 등 중요한 문제까지 우리는 몇 개의 대안을 갖고 자주 저울질을 시도한다. 질의응답 상황일 경우 질문자는 A, B, C 중 하나가 선택되거나 두 개의 선택지가 제거된 답변을 은연중에 기대할 것이다. 이때 답변자는 질문으로 인해 하나의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역으로 처한다. 질문이 만들어 놓은 일종의 프레임이다.


하지만 인생은 메뉴판에서 골라 먹는 끼니랑은 차원이 다르다. 복잡한 대상이 단순하게 풀리길 기대한다면 대상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때문에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객관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서는 프레임 자체를 파괴해야 더 좋은 답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도 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가진 질문부터 부숴야 한다.


이때 질문자는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기대했던 답은커녕, 오히려 파괴당한 질문 파편이 되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제시된 프레임 그 안에서만 노는 것이 선생, 선배, 멘토가 해야 하는 피드백의 기본 조건이 될 순 없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판단이 되면 나는 질문부터 부숴서 되돌려 보낸 적이 많았다. 결과가 어땠을까?


십중팔구 재질문이 날아왔다. 파괴로 인한 불쾌보다도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도 있다는 놀라움이 반응을 이끈 듯했다. 혹은 파괴된 질문 자체가 적절히 답이 된 것도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어느새 친밀감(rapport)과 신뢰감이 쌓이며 관계의 밀도가 형성된다. 마치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 돌아가면서 한 점 한 점 돌을 뒀을 뿐인데, 어느새 대마가 그려지고 치열한 공방전의 전장이 펼쳐지듯, 숨어 있던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며 질문자에게 필요한 조언 또한 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 과정 속에서 서로 만난 적도 없단 사실엔 늘 새삼스러웠다.


객관식으로 고민하고 있다면, 과연 객관식이 타당한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주관식으로 내 고민을 대해야겠다고 깨달았다면, 다음의 이야기를 체크리스트 삼아봐도 좋겠다.



가짜와 '진짜'에 관하여 


우선 가짜와 '진짜'라는 단어는 대비를 위해서 사용된 일종의 기호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하 내용이 어렵거나 헷갈린다면 각 단어의 의미를 떼어버리고, 마치 이름처럼 받아들여도 크게 상관없다.


내용은 단순하다. 어떤 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동인이 그의 외부에 있으면 가짜, 내부에 있으면 진짜라고 보자. 내가 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 의해 할 수밖에 없거나 해야 해서 한 일은 가짜, 내가 정말 무언가가 하고 싶고 내 안의 동기로 인해 뭔가를 이루어 내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라고 보자. 더 쉽게 풀면, 무언가에 기댄 형국은 가짜, 홀로 떡하니 설 수 있다면 진짜란 뜻이다. 이 글에서의 내 주관적 정의다.


 

가짜가 지닌 양면성: 취약성과 리스크 


동인이 외부에만 있고 내부에 없으면 그저 외적 동인에 의해 움직이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연결된 외적 동인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게 되면 본래 하려고 했던 행위는 직격탄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뭘 해야 하는 이유가 외부 상황의 변화로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니 위태로운 상황이다.


때문에 외적 동인은 엄연히 일을 추진할 동기이자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행위의 '취약성'으로도 작용한다. 결국 외적 동인은 나의 제어권을 벗어나 있다는 특성 때문에 동인이면서 동시에 '리스크'가 된다. 외적 동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그 자체가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지녔다.


이 대목에서 어디까지 그리고 무엇을 리스크라고 볼지 여부는 사람마다 관점이 굉장히 다를 거라 생각한다.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또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실상 뭐든지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어렵더라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여러분 머릿속에 어떤 것만큼은 예외로 치부하고 싶은 대상이 떠올랐다면, 나는 그 이유를 묻고 싶다. 그 이유 또한 외적 동인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내적 동인에 의한 것인지 또 묻고 싶다. 왜냐하면 내 사고체계에서는 엄밀히 이 구분은 무의미한 접근이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가차 없어야 된다.



외적 동인(=리스크)을 대하는 두 가지 행동 패턴 


이러한 외적 동인과 관련된 경험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그의 대응책은 둘 중 하나의 행동 패턴을 보일 확률이 커진다. 함축해서 요약하면, 이 리스크를 향한 공격 혹은 방어라는 행동 패턴으로 나눠볼 수 있겠다. 공격과 방어, 이 역시도 의미에 치중하기보다 각 그룹의 이름 정도로 받아들여보자. 누군가는 반대가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그래도 상관없다.


전자는 이 외적 동인을 끝내 내가 통제해낼 수 있다고 믿고 가는 태도다. 리스크처럼 느껴질 뿐 실은 리스크가 아님을 어떻게 해서든 입증만 해내면 되는 것이다. 단, 성공을 해야만 유효하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안타깝지만 변명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복권이나 주식 매수, 사업가 기질 등을 연관 지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반면, 후자는 리스크의 존재를 절절히 이해한 만큼 앞으로는 내 곁에 얼씬도 못하게끔 노력하는 태도다. 일일이 거둬내든 어떤 시스템을 통해서든 말이다. 이러한 간절함의 결과라면 내가 아는 리스크만큼은 철저하게 피할 수 있는 어떤 감각이나 습성도 체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수험생이나 취준생에게서 이런 방어적 속성을 쉽게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질문, 당신은 현재 본인이 인지하는 이런 리스크를 향해 대개 공격 중인가? 아니면 방어 중인가?



내가 살아온 가짜 삶 


위의 질문에 정답은 없다. 그저 '전략'만이 있을 뿐이다. 또 내가 원하는 전략을 구할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있을 뿐이다. 즉, '전략'과 조화로운 '시기' 선택이 핵심인 셈이다.


결국 더 나은 선택이란, 선택한 전략 수행이 가능한 상황적 시기인지에 대한 객관적 분석 그 자체다. 만약 선택한 전략을 펼칠 토대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야심 찬 전략적 선택이라 할지언정 허튼 야망이 되어 나를 다시 괴롭힐 부메랑만 던진 꼴이 되고야 만다.


그럼 글쓴이인 나의 전략은 무엇인가?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후자의 전략을 주로 구사해 왔다. 후자의 전략을 구사하리라 맘먹은 첫 시점은 초등학교 2학년 개강일이었다. 물론 살면서 나 역시 공격도 시도해 봤다. 하지만 그 공격의 실체란, 하다 하다 최외곽 방어선에서 마지못해 나온 반사적 반응이었다. 즉, 큰 틀에서 봤을 때 여전히 방어 패턴의 연장이었기에 그것을 순수한 공격 전술이라 볼 수는 없겠다. 그러니 난 수비형이다.


또다시 질문, 당신은 현재 본인이 인지하는 이런 리스크를 상대하는 공격수인가? 아니면 수비수인가?



내 생각의 OS 


결정적으로 난 나의 공격 시도가 이내 허튼 야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어린 시절부터 깨닫는다. 어린이로서는 속수무책인 환경 속에서 원하는 공격 전략을 알더라도 마음 깊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해봤자였으니까. 근데 방어 전략은 쓰면 쓸수록 기가 막히게 잘 먹혔고, 점점 난 더 수비수로 고착화된다. 내겐 대안이 없었다.


또한 내 의도와 별개로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10대의 삶, 입시생 일상의 기저에 뒀을 때 더할 나위 없이 빛이 났다. 이 높은 호환성 덕분에 단지 전략이었던 내 생각의 패턴은 10대를 거치면서 나의 이성이라는 '생각의 OS'로 아예 내면을 장악해 버린다. 그대로 내 성격이 돼버렸단 의미다. 이는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라며 쓱 놔둔 3D 색안경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멘토링이라는 막연하고 뭉뚝한 표현도 다듬고 깎아 보면, 나와 비슷한 성격 혹은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한 '성공적인 방어전략 컨설팅'이라고 볼 수 있다. UX란 어쩌면 이 콘텐츠에 입힌 패키지에 불과할 정도다. 그러니 실무 UX에 방점이 크게 찍혀 있던 이들에게는 내 답변이나 강의 내용이 영양가를 떠나서 도무지 맛없게 느껴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게다가 공격형이라면 다소 미온적인 답변에 기별조차 느끼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진짜'의 의미 


나는 지금까지 외적 동인에 대해서만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다. 눈치챘는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내 식대로 풀면 전부 가짜에 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리스크를 대하는 태도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제아무리 그래 봤자 결국 '진짜'는 아니라는 소리다.


자칫 표현 전달의 오차가 크게 생길 것 같아서 다시금 표현을 좀 더 섬세하게 매만지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가짜의 의미, 그 포인트는 그것이 '진짜'는 아니라는 것으로 핵심은 '순도'다. 순금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가짜란 순도가 많이 떨어지는 '진짜'인 것이다. 순도가 떨어지는 금도 금이다. 가짜라 칭했지만 뭐가 그렇게 나쁘고 문제가 있다는 단정적인 상태 표현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 싶은 순도가 높다는 그 '진짜'란 대체 무엇일까? 누구일까? 그것은 '지향하는 힘'이고, '지향하는 자'다. 위와 같이 리스크를 향한 공격 혹은 방어는 외적 동인에 반응하는 각자의 소모적인 대응 조치에 불과하다. 어쩌면 외부 자극에 단지 리액션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 지친다. 한계점이 분명히 있다. 이런 상황에서 꾀를 낼 줄 아는 이라면 반드시 다음과 같이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외적 동인을 최소화할까? 아니 없앨 수 있을까?


위협요인 vs. 방해요인 


소모전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주체라면, 반드시 외적 동인을 어떻게 해서든 내적 동인으로 전환하려 노력할 것이다. 근데 외적 동인이 고스란히 내적 동인으로 바뀔 수는 없다. 그러니까 외적 동인을 내버리고 새로운 내적 동인을 마련해야 하는 대전환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 대전환의 과정은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특히 외적 동인을 없애려 했을 때, 동인 자체가 말살되는 느낌이 든다면 멘탈이 무너지기 십상이다. 실은 내가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음을 그제야 직시할 수 있게 된 데에 극심한 허무주의가 엄습할 수 있다. 만약 노력을 해도 새로운 내적 동인이 영 들어차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왜 했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끔찍하게 허망하다.


차라리 아예 깨닫지 말았으면 모를까, 누군가에겐 이 '회의감'이 리스크보다도 더 큰 위협요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보수성과 합리화가 이렇게 발현된다. 정답이란 없다 했지만 이 상황에서 회피책이 마냥 답이 될 수도 없어 보인다. 다시금 리스크를 다뤄야 하는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머물 것이냐, 바꿀 것이냐, 원하는 노선을 정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줄기차게 적은 리스크란 표현은 외적 동인의 유의어나 다름없다. 단어의 의미 때문에 외적 동인이 마치 위험요소로만 비칠 것 같다. 그러나 가짜에게 있어서는 위협요인이 되겠지만, '진짜'에게 있어서는 종이 한 장 차이로 방해요인이 될 뿐이다. '진짜'로서는 외적 동인이란 공수 전략의 대상이 애초부터 아닌 것이다. 위험성 여부보다도 내 앞길을 가로막는 그냥 치워버려야 할 대상인 방해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짜'가 가진 힘 


사실 동인은 거의 양면에서 동시 발생한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외적 동인은 잠재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늘 유념해야 한다. 물론 어떤 일이 발생할 때 외적 동인이 아예 없긴 힘들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동인이 발생했다면, 그것이 나의 안팎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잘 아는 것이다.


외적 동인보다 내적 동인이 더 충만하다면 그 길로 충분히 '진짜'가 될 수 있다. '진짜'란 순도가 높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내외부 동인의 비율을 관리하는 것이 곧 '진짜'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게 뭐가 중요하길래 이렇게까지 설명을 하고 있는 걸까?


동인이 내부에 있으면 그만큼 내가 일을 향해 내 통제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 제대로라는 것은, 내가 들이부은 인풋을 아웃풋에 거의 유실 없이 투영 가능하다는 의미다. 통제력에 비례해 결과뿐만 아니라 일이 진행되는 속도와 영역에도 내가 개입할 수 있다.


통제력의 순도가 높아져 얻는 장점은, 특히 자원이 충만할 경우, 내 필요와 의도로 얼마든지 기를 숨길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저 기를 쓰기 급급한 소모전을 치른다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 즉,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적 동인이 가진 가장 의미로운 힘, '여력'이다.


또한 동인이 내부에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실패나 패착이 있더라도 온전히 나의 몫으로 귀결된다. 혹자는 이게 단점 아닌가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 외부 탓을 할 수가 없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측면은 단점이겠지만, 이로 인한 경험치를 온전하게 취할 수 있기에 큰 장점이다.



'진짜'의 자연스러운 삶: 자기계발, 갓생 


동인의 내적 순도가 높아질수록 외적 동인이라는 요소가 점차 흐릿해진다. 외적 동인이라는 리스크가 희미해진 만큼 문제가 생겨도 이제는 대개 내 안에서 발생한다. 이 통제권 내에서 생긴 문제를 대함에 있어, 이 새로운 내적 리스크의 정체를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지' '성실성'과 결부시켜 생각하려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예를 들면, 금연한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마치 의지력이 강한 족속이 따로 있는 양 표현한다. 다이어트, 공부 등 두루 적용해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난 의지박약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진짜'란 나와 거리가 먼 남의 이야기로 쉽게 치부해버리곤 한다. 과연 이래도 되냐는 것이다.


내적 동인을 갖는다는 것은 이렇듯 의지력이 강한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짜'란 어떤 순수한 착실함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다. 의지도 약하고 게으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안 그러려고 하는 노력을 동영상처럼 이어 붙인 타임라인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 옳다.


이 과정을 좀 더 객관화해서 표현하면 그게 바로 '자기계발'이다. 내적 동인을 소중히 하고 지속적으로 이를 가까이 품기 위해 쓰는 시간만이 그렇게도 담백한 것이다. 의지력이 강해서도 아니고 근면 성실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 과정을 선순환시켜 가며 '진짜'는 더욱 진짜 다움을 추출해 자신을 숙성시킨다. 어떤 이가 정말 '진짜'라면 이러한 순환의 동력이 뿜는 매력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러한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에 대한 미안함을 이제라도 갚아보려는 열정 외엔 그 어떤 대안조차 없다 보니 몰입에 취하는 것이다. 노력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일단 맛을 경험하면 돌이킬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돌이킬 수 있다면 맛을 덜 봤거나 잘못 본 것이다. 가짜의 관점에서 보면 '진짜'란 부지런하거나 의지가 강한 이들로 여길 수 있으나, 이는 착시다. '갓생'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저 순도가 높아지면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것을 어떤 특별한 행위처럼 여기는 것은 뭔가 어색하다.



동인의 궤적 살펴보기 


정답이 없기 때문에 가짜든 진짜든 어느 편에 선들 사실 문제는 없다. 뭘 해도 상관은 없지만, 뭘 원했고 또 원하는가는 분명 상관이 크다. 내가 가짜여도 충분한데 '진짜'처럼 살려고 하는지, '진짜'이길 원하는데 가짜로 서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심지어 사안마다 나의 입장이 달라도 괜찮다. 비록 시작은 가짜였을지라도 어떠한 계기로 '진짜'를 지향하게 바뀐다면 이런 날 믿어도 될까? 물론이다. 모든 '진짜'의 고향은 가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내적 동인에 대한 강한 소유욕이 싹트면 변하는 게 당연하다. 동인은 이런 의미에서도 동인이다. 즉, 궤적을 봐야 한다.


가짜가 취약성을 가진다고 했으니 '진짜'는 안정성을 가진다고 여길 것 같다. 이 생각도 문제다. '진짜'라고 하여 완성된 고정 불멸의 실체가 아니다. 순도는 시시각각 변할 수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면 '진짜'가 훨씬 안정성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안정성을 위해 '진짜'를 지향하려 한다면 언젠가 다른 차원의 리스크를 맞이할 수 있다. 외적 동인이라는 취약성을 낮추려는 노력의 결과가 곧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대는 하면 안 된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외적 동인이 보험에는 더 가깝다.


'진짜'의 가치는 내 삶과 인생의 대주주가 되는 것으로, 이것 자체가 성과는 아니다. 발판이자 토대일 뿐이다. 삶의 수많은 의사결정과 그 실행에 내가 중심이 되어 성공과 실패의 공적과 과오를 온전히 내가 행사하는 것이 주목적이지 끝이 아니다.


갈수록 내적 동인이 줄어드는가? 살수록 외적 동인이 늘어가는가? 각 사안마다 이 추이를 가늠해보고 종합한다면, 나라는 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다. 나를 알면 이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이해해 적절히 삶을 설계할 수 있다. 갈림길에서 무언가 택해야 한다면 선택의 기준이 고플 것이다. 매번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자. 습관이 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행적을 통해서도 상대방 배의 동선 또한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가짜–외적 동인–취약성–리스크–회의감
진짜–내적 동인–의지력–자기계발–여력


나는 지금도 여러 선택을 할 때 가급적 단일화된 기준을 근거로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그 하나의 기준 후보가 바로 가짜와 '진짜'에 대한 판단이다. 하는 행위들이 전부 같은 결을 취했을 때 나올 시너지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완성이란 없기에 완성도에 유념할 뿐이다.


고민을 앞에 둔 이들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보자. 나는 누구이며, 가짜인가 '진짜'인가? 어떤 선택이 나의 상황과 시기를 잘 받쳐줄 수 있을까? 내가 던진 A, B, C는 타당한가? 전부인가? 그렇다면 그중에서 뭘 선택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보다 의미 있는 질문은 무엇일까?



Cover Photo by Jordan Seo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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