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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우 Aug 29. 2022

미니멀리스트 택배기사의 첫 월급 사용내역

첫 월급은 4,821,631원이었다.

많아봐야 55만 원이던 커피 로스팅 시절의 작고 소중한 월급을 떠올리니 대비가 되어 더욱 감동적인 숫자였다.

첫 월급을 받은 주의 일요일, 나는 전보다 훨씬 넉넉해진 통장 잔고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기념비적인, ‘택배기사’로의 첫 월급이니 뭔가 의미 있는 소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물욕이 거의 없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물건을 적게 소유하고 한 번 내 것이 된 물건은 오래오래 잘 사용한다.

운동화를 모은다거나 옷을 사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해 내가 가진 몇 벌 안되는 옷은 90%가 스파 브랜드고 나머지 10%는 사업할 때 맞춤으로 제작했던 양복들이다.

신발도 브랜드를 따지지 않고 아무거나 신는다.

구두 하나, 밑창이 푹신한 운동화 하나, 샌들 하나, 택배 할 때 비 오는 날을 대비한 아쿠아슈즈 하나가 내가 가진 신발의 전부다.


액세서리는 고등학생 때 선물로 받은 시계 하나,

시계가 그것 하나밖에 없다 보니 시곗줄이 다 닳아 최근 길에 있는 액세서리 가게에 들어가 시곗줄만 새로 사서 달았다.

오에스티라는 브랜드였는데, 전 여자친구가 보고는 ‘너는 무슨 중고생들 커플링 맞추는 브랜드에서 시계를 샀냐’고 놀리던 게 기억난다.

아마 시곗줄에 조그맣게 각인된 로고를 보고 이 시계 자체가 그 브랜드의 시계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중고생 커플링 브랜드로 오해받거나 말거나 나는 이 시계를 매일 차고 다닌다.


향수는 몇 년째 베르사체의 에로스를 쓰고 있다.

사실 이 향수는 검색해 보면 주로, 40대 남자 향수 추천, 30대 이상 어른스러운 향 추천 등의 블로그 글에 주로 등장한다.

20대 남자가 쓰기에는 조금 중후한 편이라는 평이 많다.

약간 무거우면서 달콤하고, 에로스라는 이름처럼 약간은 관능적인 향이다.

사업하던 시절 양복과 이 향이 어울리는 것 같아 쓰기 시작했는데 요즘의 캐주얼 복장에도 의외로 어울린다. 어디선가 읽은 얘긴데, 향수는 차림새와 딱 맞는 느낌의 향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반대되는 향을 사용해야 그 사람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의외의’ 향이 났을 때 그 낯선 감각이 매력으로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화려하고 섹시한 이미지의 여성에게서 맑고 청아한 향이 날 때, 청순하고 수수한 이미지의 여성에게서 달콤하고 관능적인 향이 날 때 의외의 설렘이 느껴진다는 개념이다.

어쨌든 나는 택배 일을 하면서도 아침에 향수를 뿌리는 건 빼먹지 않았다.

깨끗이 샤워하고 세탁되어 반듯하게 다린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는 일은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기 위한 나의 루틴이다.


그 외에 특별히 매일 사용하거나 애착을 가지는 물건은 없다.

내 방엔 몇 권의 책과 컴퓨터 외엔 아무것도 없다.

컴퓨터도 마음만 같아선 가벼운 노트북 하나만 쓰고 싶지만 부업으로 영상 편집 일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성능이 되는 컴퓨터 본체가 필요해서 샀다.

책을 무척 좋아하지만 집에 두지는 않는다.

보고 싶은 책은 사서 본 뒤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시 보고 싶을 땐 도서관에서 빌려보다 보니 집에 쌓일 일이 없다.

게다가 요즘은 전자책을 구매해 다 보니 아직 나온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신간인데 너무 읽고 싶어 전자책 출시까지 못 기다릴 경우에만 책을 산다.

그러다 보니 컴퓨터를 제외한 내 짐은 여행 가방 하나에 모두 들어간다.


미니멀 라이프가 몇 년 전부터 크게 유행했다고 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아오다 보니 스스로를 미니멀리스트로 정의한 적은 없어서, 책을 통해 미니멀 라이프의 개념과 실사례들을 접한 뒤 깜짝 놀랐다.

“이건 그냥 내 얘긴데?”

사실 어릴 때는 가족들이 쓰지 않는 물건들을 쌓아둔다든지 냉동실에 먹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보관해놓는다든지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물건을 살 때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사지 ‘갖고 싶다’는 생각에 사지는 않는다.

물건을 많이 보관하고 더 넓은 집을 욕망하는 것이, 더 많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나는 내가 이상하고 별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미니멀 라이프라는 말을 알고 나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적게 소유하고 가볍게 사는 삶의 즐거움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옷도 안입고 살고 싶다’ 할 정도의 극단적인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은 잘 사고, 주변에 선물하기도 한다.


필요했는데 돈이 없어 못샀던게 뭐가 있었더라…

첫 월급으로 살 물건을 고민하다 문득 인터넷 서칭을 하다 우연히 본 마사지 건이 떠올랐다.

이름은 건이지만 총보다는 헤어드라이어와 닮은 물건으로, 충전해서 마사지할 부위에 갖다 대면 진동하면서 그 부위가 자극되는 기구였다.

택배 일을 하며 물건을 매일 들다 보니 허리며 어깨가 단단하게 굳어 손으로 대충 주무르는 걸로는 풀리지가 않았다.

효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써보자.

그렇게 마사지 건을 충동구매했다.

결과는 대성공.

뻐근한 허리에 그 마사지 건을 처음 해봤을 때 천국을 맛보고는 친가와 외가 조부모님들 댁으로 하나씩 사서 보냈다.     

남은 돈은 최소한의 생활비만을 제한 채 그대로 어머니의 통장으로 향했다.

빚의 1/3이 훅 줄었다 생각하니 그 어떤 물건을 사는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빨리 어머니에게 빌린 돈을 갚고 진짜 내 돈을 모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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