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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 택배기사입니다
12화
택배 첫날 15시간을 일하고 번 돈
by
김희우
Aug 27. 2022
인수인계가 끝나고 혼자 일을 처음 시작한 첫날, 아침 7시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택배 기사들의 스케줄은 출근 시간에 따라 나뉘었다.
7시에 이른 출근을 하는 기사들은 평균 100개 정도의 물량을 받아 먼저 두 시간 정도 배송을 하고 다시 돌아와 밥을 먹은 뒤 남은 물량을 받아 출발하는 ‘투배’를 했다.
그리고 9시쯤 출근해 밥을 먹고 물량을 한꺼번에 받아 배송하는 ‘완배’ 기사들이 있었다.
7시 출근 기사들은 구역을 두 번 돌아야 한다는 단점(기름 값도 두배)이 있었지만, 업무 시간이 빨리 끝났다.
이미 오전에 100개의 물량을 소화했기에 퇴근이 빠른 것이다.
각자 장단점이 있었기에 어떤 기사들은 7시 출근을, 어떤 기사들은 9시 출근을 선호했다.
하지만 나 같은 초짜들은 배달 구역을 익히는 게 가장 급선무이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무조건 구역을 두 번 도는 ‘투배’를 하게 했다.
나는 빨리 일에 적응해 한 번만 움직여도 되는 완배를 하고 싶었다.
오랜 칩거 생활로 낮에 자고 밤에 깨던 일이 많았던 내게, 생수 택배 일은 규칙적인 생체시계를 되돌려주었다. 나올 땐 분명 아직 잠이 덜 깬 거 아닌가 싶었는데, 아침부터 활기로 가득 찬 터미널에 도착해 차에 배달할 짐을 채워 넣다 보니 완전히 정신이 깨어났다.
아침 배달을 시작하자마자 비가 왔다.
꽃잎과 함께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4월 말의 가벼운 봄비는 누군가에게는 낭만일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는 끔찍함이었다.
생수든 택배든 배달 일을 할 때는 우산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택배 물량이 많을 경우 수레에 차곡차곡 쌓아둔 택배 더미에는 비 맞지 말라고 고이 비닐을 덮어주지만, 1분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돈이 벌리는 내게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쓸 여유는 없었다.
우비를 입는다 해도 어차피 젖게 된다는걸, 생수 배달 시절의 경험으로 알았다.
결국 젖을 거 우비를 입어서 땀과 빗물이 섞인 괴이한 액체로 젖느냐, 안 입어서 깔끔하게 빗물만으로 젖을 거냐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였다.
비가 와서인지, 온전히 혼자 힘으로는 처음 해보는 배달 일이 익숙지 않아 그런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내가 맡은 구역의 건물들은 쉬운 곳이 있고 어려운 곳이 있었다.
육체적으로 어려운 곳은 건물의 연구실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타고 올라 각 호마다 배달을 해야 하는 곳이었고, 쉬운 곳은 1층 한 곳에 그 건물로 온 택배를 모두 얹어두면 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살짝 불편했던 점은 대학교와 대학원의 또래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들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스스럼없이 하고, 학창 시절에는 동아리 회장으로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여기저기 활발하게 돌아다녔었는데, 사업을 접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은 후 모르는 사람들의 눈빛이 신경 쓰이고,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제 다 나았다고 생각했고, 생수와 택배 일을 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마다 찜찜함과 울렁이는 속을 부여잡고 나는 꾸역 구역 택배를 배달했다.
점심 먹는 일도 고역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보통 휴식시간이 10시인데, 그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퇴근할 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배송을 시작하기 전이니 만큼 든든하게 좋은 음식을 챙겨 먹으면 좋겠지만 실상 택배기사들은 한가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롭게 밥을 잘 챙겨 먹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또 환경도 되지 않았다.
터미널에는 택배기사들을 위한 휴게실이 딱 한 곳뿐이었는데, 한 터미널을 사용하는 여러 팀의 택배기사들을 모두 합하면 150명쯤 되었다.
휴게실은 5평 정도의 작은방으로 150명이 차렷 자세로 서서 수납되다시피 방에 들어간다 해도 다 수용하지 못할 크기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밥을 안에서 먹는 사람보다 차 안에서 먹거나 대충 상자 더미를 치우고 분류 작업하는 곳에 앉아 먹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는 운 좋게도 내가 상차하느라 대기하는 차의 자리와 휴게실이 가까워서인지 유일한 20대 막내라 배려를 받은 건지 몰라도 안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휴게실 상태를 보았을 때 그건 배려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까웠다.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한 판에 휴게실을 나서서 치우는 기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 보니 휴게실 바닥은 며칠 묵었는지 알 수 없는 음식물 찌꺼기와 자잘한 쓰레기들이 굴러다녀, 도저히 어디에다 발을 데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내게 남들보다
제법 잘하는 일을 말해보라고 하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청소였다.
하지만 이건 내가 특별히 청소라는 행위에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깨끗하지 않은 환경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내 성격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내 기준만큼 깨끗할 것을 요구도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견딜만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청소할 뿐이다.
살
기 위해 청소하다 보니 남들보다 잘하는 일이 되었을 뿐이다.
가족들과 함께 살게 된 이후에는 가족들이 칩거 중인 나를 두고 여행을 떠나면 그 여행 기간은 내가 원하는 만큼 집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대청소 기간이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가족들이 여행을 갈 때 내게 같이 갈 것을 빈말로라도 권유하지 않는다.
돌아오면 깨끗해진 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의 이런 재능을 일터에서까지 발휘해야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휴게실을 내가 음식을 섭취해도 토하지 않을 정도의 환경으로 만들었다.
택배기사들의 식사가 끝나면 조금의 주어진 휴식시간 대부분을 청소하는데 쓰다 보니 밥을 먹을 시간은 더 부족해졌는데 오히려 상관없었다.
청소하며 온갖 더러운 것들을 만지다 보니 입맛이 떨어지기도 했고, 메뉴가 보통 내가 싫어하는 김치찌개였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다 같이 근처 분식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다 보니 각자 돈을 내고 먹는 것임에도 원하는 메뉴를 고르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각자 원하는 메뉴를 골랐다간 대 혼란이 올 것이 뻔해, 아무도 거기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맨 밥만 한 두입 먹다가 거의 남겼다.
거의 공복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남은 배달을 하다 보니 속도 너무 쓰리고 속도도 나지 않았다.
비는 계속 왔고, 배달할 택배는 도무지 줄지 않았다.
바로 직전에 손바닥 살이 터져 나가는 생수 배달 일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힘들어서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결국 친구에게 ‘7-8시간만 일한다’ 호언장담한 것이 창피하게도, 첫날 15시간 일하고 10시에 일을 마치고 말았다.
그렇게 배달한 물량은 273개로 첫날 하루 20만 원 조금 넘는 돈을 벌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생수 배달 첫날처럼 마이너스도 아니었고, 힘들긴 했지만 생수 배달하던 시절의 ‘상대적으로 덜 힘들었던 날’보다도 훨씬 덜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의 대가를 받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처럼 ‘미래의 건강을 돈과 맞바꾸는 일’이라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아서 좋았다.
잠들기 전에 하루를 정리해 보려 했다.
첫날 하루 동안 느꼈던 불편함 들을 다시 떠올리며 어떻게 개선해나가면 좋을까 생각하고 해결책을 고민하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생각도 하기 전에 스르르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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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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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청년 택배 기사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저자
일상 틈새에서 은밀히 빛나는 무언가를 길어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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