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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우 Sep 01. 2022

택배기사가 바라본 20대 청년 고독사

택배 일을 시작한 뒤 휴대폰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 뉴스도 안 보게 됐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부정적인 소식과 멀어져 좋은 점도 있었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만 모르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일 때가 종종 있었다. 

친구라고 하기엔 멀고 지인이라고 하기엔 가까운 T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일요일에 와서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다들 와서 돕긴 하겠지만 가전제품 옮겨야 할 게 좀 있을 거 같아.”

친구가 건 전화의 목적은 T의 죽음을 알린다기보다는 T의 죽음으로 파생된 몇 가지 곤란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가까웠다. 

갑작스레 T가 떠나서 그가 자취하던 방의 가구며 물건들을 다 갖다 버려야 하는데 힘쓸 사람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평생 강원도 끝자락 어느 시골 마을에 살다가 대학 입학과 함께 홀로 상경한 T에게는 연락이 닿는 가족이 없다고 했다.

사실 나는 T를 사적인 술자리에서 친구의 친구로 한 번인가 두 번 본 게 다였고, ‘아 그런 녀석이 있었지.’ 하고 이름을 들으면 어렴풋 그의 얼굴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머리 모양이 어땠는지 디테일을 말해보라면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도 얼굴을 본 적 있는 내 또래의 지인이 죽었다는 건 상당히 충격적이라, 전화를 받고는 가슴께가 무거워지며 숨이 턱 막혔다.


“어쩌다 갑자기 그렇게 된 거야? 교통사고?”

다짜고짜 T의 죽음만을 알리면서 도움을 요청할 뿐 그 외의 정보는 일절 노출하지 않는 친구에게 나는 눈치 없이 되물었다.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T라는 아이 특유의 활발한 분위기와 에너지가 생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생명력이 충만한 친구였다. 

무슨 말을 해도 주변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고, 분위기가 들떴던 것이 기억났다. 

우연히 겹쳤던 그 술자리에서 죽음이라는 단어와 가장 먼 사람을 한 명 고르라면 그 친구를 골랐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갑작스러운 그의 비고는 충격적인 만큼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살.”

친구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밝았던 친구가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얘기를 더 들어보니 딱하기 짝이 없었다. 

연고자를 찾을 수 없어 장례를 치를 수도 없고,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하고, 살던 집을 정리하는 일을 친구들이 돈과 힘을 모아 해야 할 상황이었다.

“일요일에 짐 옮기는 거 말고도 뭐든 도울 일 있으면 말해.”

이건 T와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내 친구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며칠 후, 약속한 일요일이 되기도 전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안 와도 될 거 같아. 내가 먼저 가서 보고 왔는데 그 녀석, 생각보다 짐이 적더라고. 옮길만한 건 티브이 하나가 다인데 내가 들 수 있을 거 같고, 옷장은 이케아 비슷한 거더라.”

“그래도 옷장이면 기본적으로 무겁지 않아? 가서 도울게.”

옷장이 ‘이케아 비슷한 거’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내가 바보같이 이렇게 되물었다.

“조립식이더라고. 분해해서 옮기면 돼.”

“그리고 아무래도… 너는 모르는 친구들도 많을 것 같고, 애들 상태가 좀… 그래. 여자애고 남자애고 할 거 없이 길 가다가 갑자기 울고 그래서. 어쨌든 선뜻 도와준다고 해서 고맙다.”

친구가 덧붙였다.

다행히 T의 이모와 어렵게 연락이 닿아 그분이 서울에 오고 계시는 상황이라고, 친구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친구는 전화를 끊지 않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사실 T가 두 달 전에 일을 그만뒀어.”

T는 어느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인턴으로 시작해 지금은 계약직이지만 2년을 채우면 무조건 정규직을 시켜주기로 했다, 복지가 좋다"라고 기쁜 목소리로 얘기하던 게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런데 그 해 봄, 코로나로 매출이 부족해지면서 T를 포함한 대부분의 비정규직 인원이 계약 종료와 함께 그대로 회사를 나와야 했다. 

T의 경우 계약기간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몇 달 있으면 1년을 채우는 상황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잘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스스로 나가라는 식의 압박을 준다고 술자리에서 자주 괴로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고 일자리는 너무나 적었던 21년 봄, T는 결국 비정규직임에도 꼬박꼬박 ‘우리 회사’라 부르며 애정을 갖고 일하던 그 회사를 스스로 나왔다.


“T는 그 뒤로도 일자리 구하려고 계속 노력했어. 근데 박봉에 매달 월세가 50만 원 넘게 나가니 모아둔 돈도 없고,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괜찮은 자리가 없다고 힘들다고 하더라고. 급하게 당장 취업되는 어떤 회사에 들어가긴 했는데, 알고 보니 신입들이 일주일도 못 버티고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나오는 이상한 회사였다나 봐.”


결국 다시 구한 일마저 그만둔 T는 매달 나가는 월세를 내기도 힘들어졌고, 죽기 전 한 달 동안은 작정이라도 한 듯, 카드 대출로 돈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T가 큰 사치를 부린 것은 아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주문하던 배달음식과 편의점 소주값이 그가 쓴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마침내 T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그를 내보낸 거나 마찬가지인 직장에서 1년을 채웠더라면 받을 수 있었을 금액과 놀라우리만큼 비슷한 금액의 카드빚이었다. 

그는 유서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 금액을 자취방 보증금에서 제해 갚고, 시신의 처리도 보증금에서 제해 달라고 써두었다.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폐만 끼쳐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T를 함께 알던 친구들 중에는 T의 행동이 안일했고,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T를 훨씬 더 깊게 알던 친구라, 아마 친구들을 두고 먼저 간 T에게 너무 서운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어떤 말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한동안 약간 울적한 상태로 지냈다.


택배 일을 시작하기 전, 자동차를 사겠다고 커피 로스팅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아르바이트 자리도 그러고 보니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했었는데, 월급이 쥐꼬리라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만약에 통장에 20만 원이 남았던 내가 택배 차를 살 돈을 어디서도 빌리지 못할 상황이었다면, 서울에 함께 지낼 수 있는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까지 재기하기는커녕 긴 터널을 걷고 있었을지 모른다.


내 경우엔 돈을 잃은 후 대인기피와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시절에도 몸을 의탁할 부모님의 집이 있었고, 모아놓은 돈도 2천만 원가량 남아있었었다. 

그래서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죽지는 않았고 세상에 다시 나올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T에게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힘들면 육체노동이라도 해서 돈 벌고,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만 해도 원래 체력과 운동신경만큼은 자신이 있어 ‘육체노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지, 체질 자체가 연약하고 사무직 일자리만 해왔던 사람에게는 그런 결심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


T의 사건 이후 봇물 터지듯, 비고가 이어졌다.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주변에서 알던 사람이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들이었고 그들 전부가 내 나이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2030대였다.

그중에는 내가 배송하던 구역에서의 방화 사건도 있었는데, 소방차가 7대나 출동하는 큰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구체적인 이유는 현재까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몇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반지하에 번개탄을 피워 삽시간에 빌라에 불이 번진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시간 내어 기사를 찾아보니 실제로 코로나 이후 고용시장이 얼어붙고 대인관계가 어려워지며 청년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보도가 많았다.

그 봄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마음이 아픈 이유에는 연민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통장에 20만 원이 남았던 과거의 내게 살아야겠다는 집념이 조금 덜했다면? 중고로 택배차를 살 수 있게끔 돈을 빌릴 곳이 없었다면?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해 봄에 직간접적으로 접했던 부고들은 결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죽음들은 내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또 아프게 다가왔다.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죽음이 아니었어도 그토록 괴로웠는데, 그 죽음의 바로 곁에 있던 이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 계절을 지나며 나는 진심으로 외로운 죽음 없는 따뜻한 세상을 염원했다. 그래봐야 이미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만 앞으로 사회에 나올 다음 세대의 청년들만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살길, 이미 세상을 등진 이들에게는 진정한 안식이 있기를,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고통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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