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킴쓰 Aug 19. 2024

#19. 너랑 나만 아는 이야기

우리 학교에서는 변리사시험준비반(이하 ‘변시반’)을 운영했다. 변시반 회원이 되면, 보장된 열람실 자리와 휴게공간을 사용할 수 있고, 동영상 강의 등 여러 시험준비 자료를 공유 받을 수 있다. 공동의 목표를 가진 수험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다보니 선배 후배를 떠나 어느새 친구가 되고, 전우가 되어 막강한 유대감을 갖추게 된다.


내가 변시반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변시반 총무였다. 그는 이미 변시반에서 다음 시험에 당연히 합격할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학부때에도 과탑을 놓치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공부쪽에서는 유명인사였다. 게다가, 그와 나는 4학번이나 차이가 났으니, 아마 그의 눈에 나는 갓 변리사 시험을 공부하는 꼬맹이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가끔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정도의 형식적 인사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나눌 때 한두마디 정도 섞는 딱 그 정도 사이였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빠 장례를 치르고 변시반에 돌아오고나서 부터였다. 단지 “총무”였기 때문에 장례식에 왔었던 그였지만, 명랑하고 밝기만 했던 나에게 드리워진 그늘이 그에게 애잔함을 선사했나보다. 연애의 시작은 측은지심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날 이후 그는 가끔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기도 했고, 공부 노하우를 전수해주기도 했고, 쉬는시간에 편의점으로 데려나가 초코우유 등을 사주기도 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던가!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불합격으로, 뜻하지 않게 그와 나의 수험생활이 겹치게 되면서 우리 사이는 조금 더 특별해졌다.


다만, 특별해진 우리 사이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동료들은 늘내가 걱정된다고 했다. 알고보니 그에게는 변시반 안에서 한 언니와 특별하게 지내다가, 요즘말로 썸만 타다가 사귀지 않았던 전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관계속에서 불안감이 엄습한 어느 날, 너와 나는 무슨 사이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널 특별하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수험생이니 시험 끝나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의 솔직한 대답이 오히려 좋았고, “사귐”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고 단정하며, 오랫동안 그 관계를 유지했다.


그와 내가 같이 시험을 본 해에 그는 합격했고 나는 불합격했다. 수험생활이 나에 비해 훨씬 길었던 그에게 좋은 소식이 먼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심으로 보낸 축하문자에 고맙다는 짧은 인사만 돌아왔을 때 그가 나를 떠났음을 알았다.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그에겐 나는 그냥 과거였다. 그에게 얼핏 들었었던, 수험생활로 인해 이어지지 못했던, 그때 그 약사 언니와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했고, 뒤바뀐 집안 환경 탓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상처받은 마음을 보살필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중,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영락없는 수험생의 꼴을 하고 있는 나와 달리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달라져 있었다. 그도 당황했는지 나를 보고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를 마주친 그날은 영 공부가 되지 않았다. 엉덩이가 들썩거려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울음소리를 들킬 것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다. 미움, 분노, 자책, 무기력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삼켰다. 수험생활을 핑계로 가지 않았던 교회를 나가 들쑤셔진 마음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 다음해에 나는 합격했다. 이곳저곳에서 축하인사를 받던 중 익숙한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였다. 

“좋지? 일해봐 너무 힘들다”


내가 들었던 가장 멋없는 축하인사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옛날에도 그랬다. 그는 자기자신이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식사를 함께했지만 메뉴를 정하는건 늘 그였다. 더운 여름날 들어간 식당에서 선풍기가 나를 향해 돌고 있을 때 한마디 말없이 선풍기를 자신을 향해 돌렸다. 농담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에 안드는 옷을 내가 입고가면 버리라고 했고, 시험 끝나면 살을 꼭 빼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 


애 엄마가 된 현재에서 돌이켜보면, 그때 정나미 뚝떨어지게 나를 차줘서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을 정도다. 


최근에 변시반 선후배의 모임이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괜히 이죽거리며 급히 내 눈치를 보는 척을 한다. 그들에겐 10년도 더 된 치정 로맨스 이야기가 아직도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는 입사한 첫 회사에 계속 다니면서 사회적으로는 자리를 잡았지만 늘 외로워 보인단다. 연애와 담 쌓은지는 오래고 주말에도 서류더미 속에 파묻혀 일만 한단다.


듣고 있자니 “잘됐네! 내가 너 그럴줄 알았다!”가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이 일렁이는걸 보면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흘렀다.


그래, 이 말이 괜히 명언이 아니다.

복수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사랑으로.

이전 17화 #18. 친구가 점점 사라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