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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쓰 Jun 04. 2024

#9. 헤어질 결심이 필요한 순간

2022년 8월 8일의 끄적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어린아이가 집에 있기에, 영화 보러 가기 마땅치 않지만 "보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하게 든 이유는, 싱그러웠던 20대, [헤어질 결심]이 필요했던 순간이 생각나서였다. 



26살 어린 나이(지금 생각하면 진짜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의 회사생활은 집을 나서는 일부터 퇴근하기 까지, 모든 것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자리도, 누구나 다 내 모니터를 훤히 볼 수 있는 사무실의 복도가에 배치되었고, 늘 감시를 받는 느낌(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 깨달았지만)이었기에, 업무 외에 딴짓이란 것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못했다.


팍팍한 회사생활에 한줄기 빛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바로 옆자리 "그"였다. 

그는 일단 잘생겼다(내 눈에는 기태영처럼 보였다는 ㅎㅎ), 또 자상했고(자잘한 나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었고),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했기 때문에 일에도 나보다 능숙했으며, 각자 팀의 막내라는 유대감도 있었다. 


점심은 먹었냐, 퇴근은 언제 하냐, 저녁은 먹고 갈 거냐 등등의 사소한 질문들이 특별한 관심으로 느껴졌고, 

퇴근하면서 우연히 함께 먹었던 떡볶이는 우리만의 추억이 되었으며, 그 이후 도시락을 싸와 먹으며 둘만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냉장고 어딘가에 간식을 넣어두고 꺼내먹으라고 알려주는 그의 모습, 몽골로 휴가를 다녀온다는 나에게 약의 역할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은 상비약을 챙겨주는 그의 모습은 그가 나에게 뭔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다른 동료가 그에게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OO 씨, 여자 친구는 잘 있어?" 


Whaaaaaaat!!!!!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알고 보니, 그에게는 장거리 연애를 하는 오래된 여자 친구가 있었고, 그 당시 그의 피셜에 의하면, 요새 관계가 소원하다고 했다. 관계가 소원하니 뭐니를 떠나서, 나에게 확신을 준 그의 행동은 엄연히 기만 아닌가!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뭐라고 할만한 공식적인 사이도 아니었기에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부글거리는 심경변화가 그에게도 느껴졌는지 그는 할 말이 있다며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고, 퇴근 후 이름 모를 호프집에 우리는 나란히 앉게 되었다. 

요즘 무슨 일 있냐는 그의 헛헛한 질문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쏟아내었고, 이에 대해 그는 여자 친구와 정리하겠으니 기다려 달라고, 곧 너에게 가겠노라 대답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는 친구의 연애 상담 요청이 있었더라면, 미쳤다고, 그걸 왜 기다리냐고, 그렇게 환승 이별하는 놈을 어떻게 믿냐고, 나중에 너한테 똑같이 하면 어떡하냐고, 아주 칼 같은 대답을 내놓았겠지만, 

막상 나의 일이 되니 마음이 흔들렸다. 또한 그에게 이미 가버린 나의 마음을 이성의 끈으로 잡아채 오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외로운 줄타기는 시작되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가볍게 맥주를 걸치고, 나의 손을 살포시 잡는 그의 손을 허락했던 날은 퇴근 후 강남역을 어느 홍콩의 밤거리로 변하게 했지만, 데이트하던 중 그의 폰에서 여자 친구로 의심되는 번호를 보게 되는 날은 다 식어빠진 피자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작은 꽃다발과 함께 나를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는지 구구절절 적어놓은 편지를 받은 날은 사랑받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라는 황홀감에 빠지는 반면, 고향에 내려간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은 아닌지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였다.


이런 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슬슬 피로감이 쌓이기 시작했고,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하는 그의 행동에 지쳐갔다. 

"그와 나의 관계는 건강한 관계인가?"

"나의 행복을 왜 남의 손에 의존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은 정리되었으며, 널뛰기 같은 마음을 감당하면서 이 불안한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넘어가면 나의 배역이 불륜 드라마의 내연녀가 될 것 같았고, 내연녀의 마음을, 세상에서 손가락질받는 불륜을 이해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헤어질 결심]을 한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정리된 마음을 그에게 전하니, 그는 이번에도 역시나 기회를 한번 더 달란다.

하지만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가?"라는 질문에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라는 답을 내었기에, 이번에는 그에게 기회를 줄 수 없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지나온 불안한 시간들과 비교해 마음은 편했다. 


몇 달 뒤, 그는 여자 친구와 정리했다며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다.

타인의 마음을 거절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고, "기회를 잡았어야지"라는 농담의 말도 그에게 건넬 수 있었다. 



영화 제목을 왜 [헤어질 결심]이라고 정했냐는 어느 MC의 질문에 박찬욱 감독은 사랑에 빠질 때는 이유도 알 수 없고, 특별히 마음먹지 않아도 감정이 부풀어 오르지만, 관계를 정리하고자 할 때에는 이유와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헤어질 결심]은 다른 결심들 보다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100프로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적이든 아니든 헤어져야 하는 나만의 이유를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것 같다.

 

여자 친구와 정리했다며 다시 나를 찾아온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가보지 않은 길은 늘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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