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삶, 일기 편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잃지 않는 마음

by 개복사

사람들은 ‘일기’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나는 멍든 백도를 떠올린다. 유난히 잘 물러서 어딘가 멍들어 있는 백도. 일기에 담기는 마음과 생각이 그와 닮았다. 희었던 부분은 쉽게 사라지고 거뭇한 멍 자국으로 뒤덮여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존재한다. 상처 입기 전의 온전했던 마음은 흐릿해지다 이내 지워져 남아있는 감정만이 진짜인 것 같다.


대개 마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말이나 글이다. 손짓이기도 하고 노래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는 그 외의 다른 방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언어는 물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존재하나 잡히지 않고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형체가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닿지도 않고 튕겨나가며 누군가에게는 닿자마자 흡수된다. 누군가에게는 보드라운 잎이 되어 마음을 간질이고 누군가에게는 뾰족한 가시가 되어 고통을 준다. 솜사탕처럼 달기도 하고 홍삼처럼 쓰기도 하다. 어떤 때는 적당하다가도 어떤 때는 너무 뜨겁고 또 너무 차갑다. 그래서인 것 같다. 마음이 자꾸 다치는 건. 넘어지고 무너지고 때로는 잠기는 이유가.


그런 마음을 남기는데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글이다. 그중에서도 핸드폰 앱 일기장을 자주 쓴다. 장소와 시간의 제한이 적고 어디서나 편하게 쓰고 지울 수 있어서 좋다. 가끔씩은 타자를 치지 않고 음성 받아쓰기를 활용한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적응하고 나니 생각보다 편하다. 게다가 일기를 쓰면서 동시에 발음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러나 쓰기 편하다는 건 지워지기도 편하다는 뜻. 핸드폰 잠금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몇 개월 치의 일기가 초기화와 함께 사라진 뒤에는 손으로 쓰는 일기장도 열심히 쓰는 중이다. 카페에 갔을 때는 카페 로고가 박힌 냅킨에 일기를 적기도 하고, 어디서든 로그인하면 그만인 SNS에 올리기도 한다. 조금 전 받은 영수증이나 굴러다니는 조각난 메모지에 짧게 적을 때도 있다.


여름이 오기 전에는 새로운 형식의 일기를 시도해 봤다. 글이 아닌 말로 쓰는 영상 일기였다. 일기를 영상으로 남겨보자고 생각한 건 영상화된 세상 때문만은 아니다.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글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영상에는 분명하게 보일 표정, 몸짓, 말투, 억양, 인지하지 못하는 생활 습관 같은 것들이. 규칙은 단순했다. 4분 미만으로 남길 것 그리고 영상을 찍은 뒤 곧바로 재생해서 볼 것. 일기를 쓸 때 30분은 가볍게 넘기는 나로서 4분은 대단히 큰 결심이었고, 보여주는 식이 아닌 비공개용으로서 남기는 것도 신선하다 못해 어딘가 낯간지럽기까지 했다.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남길 때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다시 보니 영상에 일상 말고도 스스로에게 보내는 감사와 응원과 소망이 담겨 있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의지로 번져나갔는지 목표를 조금씩이라도 이뤄내며 더 나은 오늘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지만, 열심히 마음을 들여다보고 근육을 키우기 전에 쉼 없이 나를 넘어뜨리는 변수를 뿌리 뽑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하필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지. 아무리 노력하며 살아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에 따른 적절한 결과와 보상이 아니라 오만 가지의 변수 같아서 슬퍼지기도 한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도 몸의 근육처럼 힘을 키워야 한다고 다짐한다. 구겨진 라이스페이퍼를 힘으로 펴듯이. 조금 강압적이더라도 열심히 마음의 근육을 키워본다.


기록이란 게 그렇다. 쌓이면 쌓일수록 힘이 생긴다. 확실한 증거가 된다. 삶에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준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늘을 살면서 내일로 나아가야 하고, 내게는 일기가 그 방법 중 하나다. 몸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듯이 마음의 건강을 위해 일기를 쓴다. 기쁘고 즐거운 일뿐이 아니라 상처받은 말, 힘든 상황, 속상하거나 억울한 일, 누구에게도 못할 이야기, 아무리 떠들어도 자꾸 안에 남는 이야기, 바라는 삶, 지독한 현실, 그게 뭐든 간에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것이다. 가면을 씌우거나 외면하거나 안에 쌓아두지 않고 맞는 언어를 찾아 밖으로 내보내는 연습을 하다 보면, 단단해진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더 매끄럽고 수려해진 말과 글은 덤으로 얻는다.


그래서 더욱 일기를 열렬히 쓰는지도 모르겠다. 본래 가지고 태어난 그대로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순 없지만, 인생이란 게 이기고 지는 게임도 아니지만,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리지 말고 단단히 틀어쥐고 있자고. 마음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 확인한 뒤에 촘촘하게 완충재를 두르고, 다른 사람이 그냥 던지는 돌은 오뚝이처럼 가뿐히 피하고, 물에 잠기면 아가미를 달고 뭍으로 나와 숨을 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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