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잃은 기분이면 책을 읽었다. 읽고 있으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럴 때 비로소 살아있는 것 같았다. 시체가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내게 읽기와 있기는 하나다. 모든 독서가 그런 건 아니지만, 있으려면 읽고 읽으면 있게 된다. 처음에는 읽는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 기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왕 읽는 김에 완독이라도 남겨보자 했던 게 10년 전이다. 읽는 동안 있게 된다면, 그런 기록을 남긴다면 더 오래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 때, 길을 잃을 때, 어딘가로 숨고 싶을 때, 삶의 지혜와 인내가 필요한 모든 순간에 작게나마 빛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지만, 우주는 너무 넓고 멀어서 아직은 지구 외의 선택지가 없다. 그러니 절에 몸을 욱여넣을 수밖에. 개중에 마음 드는 곳을 점찍으며 점들을 선으로 이으며 나만의 마당을 만들고 가꿀 수밖에. 크게 분류하면 문학과 인문학. 작게 분류하면, 소설, 시, 에세이, 심리학, 철학, 역사, 여행, 사회학, 과학, 청소년, 자기 계발, 경제, 예술 등 크고 작은 마당을 곳곳에서 넓혀가며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분류로 보면, 가장 넓은 마당은 소설과 인문 교양이다. 아무래도 삶의 고난이나 감정의 기복과 상관없이 어느 때고 읽을 수 있는 분야라서 그런 것 같다. 깊이가 있고 무게감이 있는 책들은 좀 더 집중을 요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는 손대기 쉽지 않다.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고 정신이 그에 다 쏟아져 있는데, 다음 문장으로 장으로 넘어가기는 어렵다. 애초에 표지를 펼치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독서 기록에는 완독 외에 별도의 목록이 하나 있다. 정확한 이름으로 말하자면, ‘당장 읽고 싶지만, 심적 여유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 끝까지 완독하고 싶은 목록’. 짧게 줄이면 독서 예정 목록이라 할 수 있는데, 어느새 100권을 넘겼다. 한 권 겨우 완독했다 싶으면, 두 권이 새로 추가되는 추세다. 처음엔 조금 신경 쓰인 게 사실이나 이제는 그러려니 둔다. 말 그대로 언젠가 읽겠지 싶은 마음으로,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런 나라도 모든 순간에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다. 한번씩 다 내려놓고 지내기도 했다. 인생을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내게는 다섯 개쯤의 하향점이 있고, 세세하게 살펴보면 가지각색의 하강 그래프가 존재할 것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깊은 아래의 점. 또는 그 반대로 저 위에 있는 점. 분명한 사실은, 점안에 갇힐 때면 꼭 무언가를 읽었다는 것이다. 바닥으로 추락할 때마다 빛으로 나갈 사다리가 되어주었던 것은, 내가 읽은 모든 책, 모든 문장이었으므로. 추락하는 만큼 다시 올라오는 길도 만만치 않으나 하나하나 쌓아 올린 디딤돌에 기대며 올라가고 나아가며 존재해 온 것은, 잊을 수 없는 과거이자 현재이며 동시에 미래이기도 하다.
이제는 읽기를 통해 있는 걸 넘어선 느낌을 받는다.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존재함을 넘어서서 좀 더 감각하게 되는 느낌이다. 그럴 때는 마치 내가 내 삶의 주도권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 같다. 빼앗기지도 놓치지도 않고, 그럴 일이 존재할 가능성조차 없는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세 권. 소설책 두 권과 과학책 한 권이다. 병렬 독서에 전자책(ebook)까지 익숙해지니 읽을 수 있는 상황도 도서도 나날이 늘어서 좋다. 삶이 다할 때까지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런 실없는 욕망조차 나를 살아있게 하니, 책이란 정말 존재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아니지 않나 싶다.(by 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