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이 없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거는 함정. 한정 없는 입맛의 소유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비법이다. 일부 먹방 유튜버처럼 거대한 위를 타고난 것은 아니다. 내 위는 보통의 크기고, 오히려 소화량은 줄었으며, 입이 작은데 실평수는 더 좁아서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양도 적다. 한데도 작은 입이 부리는 거대한 욕망은 언제나 끝없이 이어진다.
‘새삼스럽다’는 말을 하다가도 솥뚜껑 위 지글지글한 삼겹살이 떠오르고, 삼겹살 하면 빼먹을 수 없는 깻잎이나 청상추 같은 쌈 종류, 고수, 양파장아찌, 두릎장아찌, 매실장아찌, 미나리, 김치, 감자 같은 것이 함께 번쩍인다. 그러면 다시 번쩍이는 식재료에서 음식으로 번져 나가고, 아마도 그러한 까닭으로 마음 한편에 매 순간 먹고 싶은 음식이 101가지 정도는 거뜬한 게 아닌지. 그런 기술이 이미 있는지 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만으로 냄새를 풍길 수 있다면, 삶의 스트레스가 쌓일 틈이 없을 게 분명하다.
이쯤이면, 음식만으로 눈빛이 형형해지는 순간이 불시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될 듯싶다. 그럴 때 주변의 평가는, 무섭다, 두렵다, 재밌다, 신기하다 등으로 가지각색이다. 특히, 음식 없이는 산송장인 나와 180도 다른 동생과는 20년 넘게 아직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급작스러운 알레르기 발현으로, 지천에 음식을 두고도 못 먹고 조금이라도 열을 배출하겠다고 매일 울면서 운동할 적에는 동생이 부럽기도 했다.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고, 먹을 수 있는 건 스님보다도 적었던 시절이었다. 먹고 싶은 것도 드문드문 있는 동생. 음식에 관해서라면 선호도만 있을 뿐, 과식은 일절 없고 정량과 소식만 있는 그는 닿을 듯 닿지 않는 나의 이상향이다.
이러한 식탐과 식성은, 놀랍지 않지만 피에 박혀 있었다. 다름 아닌 외가 쪽에서 내려왔다. 일반인으로서 아무렇게 추측해 보건대, 동생이 생길 줄 모르고 식성에 대한 유전자를 내가 다 가지고 나와 동생만은 차분하고 정적인 식성을 지니게 된 것 같다. 다만, 외가 식구들과 다르게 유전자 배합 과정의 문제인지 몸은 따라주지 않고 마음만 대식가라 모든 순간에 과식하지 않기 위한 나와의 줄다리기는 더없이 잔인한 현실이다.
근래에는 잘 나이 듦에 대한 고민이 짙어 가족, 친구, 지인, 하여간 어른의 식사를 심도 있게 관찰 중이다. 타고난 장기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에 맞게 조금씩 식사량을 줄이는 것처럼 건강을 챙기는 사람이 있고, 편식과 질병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운동이 불가할 땐 냅다 절식하는 사람, 무조건적인 소식만 하는 사람, 제대로 된 식사 없이 간식만 먹는 사람, 몸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해로운 식사를 하는 사람 등등. 간단히 정리하면, 몸 상태를 알거나 모르며 건강한 식사를 추구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경우로 분류된다. 물론, 현실과 이상은 경계가 분명하여 몸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서글픈 경우도 존재한다.
결국은 모두 건강의 문제. 살아있는 동안은 피할 수 없다. 식사는 건강과 직결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어렵다. ‘건강’이란, 오히려 건강하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 같고, 건강해지려고 하는 행위가 삶을 한정시키거나 함정을 두기도 한다. 백미 밥보다는 잡곡밥이 좋고,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을 골고루 챙겨 먹어야 하고, 간과하기 쉬운 나트륨과 당류와 카페인도 신경 써야 하며, 러닝을 위해서는 2시간 전에 식사를 끝내야 좋고, 점심에는 식후 10분이라도 걷는 게 좋으며, 새벽 2시 전에는 잠들어야 하고, 식후 4시간이 지나야 완전히 소화되며, 취침 전에는 가급적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좋고, 그렇게 마감에서부터 앞으로 꼬리를 물어가면 어른이 어린이보다도 더하다.
근무 주간의 1일 1식, 평일 식후 운동, 한갓질 때를 노리는 안이함, 폭식과 절식의 롤러코스터 모두 편향된, 한 마디로 지속 불가능한 방식이다. 어린이에게는 하루빨리 칭찬 스티커를 모아 보상을 받는 게 중요하겠지만, 어른은 그렇지 않다. 속전속결이 아닌 꾸준하게 모으는 스티커 그 자체가 보상이다. 한정에 갇히고 함정에 빠질 때는 그 자체 그대로 두는 것. 늪에 빠졌을 때는, 몸부림칠수록 더 빠르게 가라앉는 법이므로.
살아가는 것, 나이 드는 것,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모두 인터벌 운동과 닮았다. 힘들어 죽겠는데 더 힘든 순간이 오고 그러다 숨 돌릴 순간이 찾아오며 살만하다 싶어지지만, 이내 곧 고난이다. 때로는 낭떠러지 같다. 구석구석 안 아픈 곳 없이 없다. 나는 운동하지 못하는 날이나 폭식하는 날이나 보름달보다 더하게 부은 얼굴이며 낙곱새(낙지+곱창+새우)처럼 울긋불긋 뒤집어진 피부를 사랑하는 재주는 없다. 결함도 많고, 여기저기 아파 삶의 폭에도 나날이 제한이 생기니 스스로가 미울 때도 많다. 다만, 넘어지는 김에 쉬어가고, 보다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면서 한계를 배워나갈 뿐이다. 그렇게 한계의 지점을 넓혀가며 나이들고 싶을 뿐이다. (by 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