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힘이 남아 있거든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계획을 짜라. 울어도 되지만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지만, 정작 나는 울 줄도 몰라 속으로 곪고 있다. 다친 것과 갇힌 것, 그중 제일은 역시 다친 채로 갇힌 것.
오래도록 갇힘에 대해 생각했다. 다친 것은 회복할 수 있지만, 갇힌 것은 회복의 개념이 아니다. 다친 뒤에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수 있지만, 갇혀본 뒤에는 공포가 남는다. 다시 갇힐까 두려워 스스로를 가두기도 한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쓰고 합리화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100세 시대에, 젊은 시절 경험 정도야 흐릿해진 과거가 될까 싶다가도, 유년 시절이 삶의 모든 걸 정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늘의 고통이 비슷한 상황의 미래에서도 고통으로 발현되는 걸 생각하면 암담하지만. 숙제를 미루지 않는다면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
일상의 크고 작은 부상에서도 표출하기 힘든 게 있다. 근본적이면서 독보적인 것, 바로 직업이다. 일에 대해서는 막연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없고, 당연히 갖게 될 것이라 믿은 것 또한 없다. 지금의 직업을 생계 수단으로 삼기까지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그냥 그런 날이 모여 지금이 되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회인으로서의 자아는 그렇게 두루뭉술한 상황으로는 살아남기 힘들다. 연봉만 해도 학력별, 직급별 차이가 있으며, 같은 직군 안에서도 내규에 따라 산정되는 액수가 다르고, 같은 연차여도 직종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든 프리랜서로 일하든 능력별 계급은 말할 것도 없다. 어디 그뿐일까. 드는 품은 점점 늘고 나는 점점 늙어가는데, 이 일로 언제까지 얼마큼 먹고 살 수 있을지, 직업을 바꾼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런 고민도 매 순간 나를 붙든다. 더욱이 나날이 늘어나는 멀티태스킹에, 점점 더 세밀해지는 AI 기술까지.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성장하기도 하지만, 열정과 노력의 결말이 성공은 아니듯 그사이에는 오롯이 내 몫으로 남는 상처도 함께 존재한다.
단지, 넘어져 다친 거라면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다. 아프지만 나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나은 적이 있고, 꼭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낫는 걸 본 적 있으니까. 하지만, 일에 관해서라면 좀체 방도를 찾기 어렵다. 우리가 마주하는 타인의 일이란 모두 과정을 제외한 결말뿐이므로.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욕망, 선명한 한계, 쓸데없이 견고한 규칙과 그에서 비롯된 아집 그리고 주어진 시간과 역할. 성취와 실패가 함께 굴러가는 직무적 숙제 앞에서, 생채기도 창문 없는 감금도 필연적 과정인 것이다.
일에서 깊고 얕은 정도는 중요하지 않다. 조금 튀어나온 돌 하나가 하루를 망치기도 하고, 한 번의 실수가 도미노가 되기도 하고, 불을 끄겠다고 부은 물이 기름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인과와 부상을 혼자 헤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도 고난이다. 빛과 같은 도움이 늘 보장되지 않고, 그릇된 도움일지언정 반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부상은 자연히 불가피하다. 적절한 타이밍에 적합한 도움을 받는 건 언제나 꿈만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도움을 청하고 받는 건, 책임의 포함이어서 그렇다. 끝을 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기도 하고. 하다못해 다음이 예견되더라도, 형식적으로라도 도움을 청하는 건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요즘의 나는 갇혀 있고, 다친 상태다. 창문도 문도 보이지 않고, 눈앞은 흐려서 손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있는 방은 내가 꼭 벗어나야 하는 방. 하지만 언젠가 벗어난 데도, 또 다른 방이 존재할 것이다. 다음 방에서는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갇힌 상태를 유보하지 않고 계속 해결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썩는 일은 절대 겪고 싶지 않다. 오늘의 숙제는 확신이 없더라도 꼭 당일에 끝낼 것.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면 고민은 끝나고 다시 힘이 날 것이다. 열쇠가 손안에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함께.(by 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