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조각. 오묘하고 아찔한

by 개복사

/

130 조각



태초에 ‘유자차’와 ‘유모차’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유아차’라는 말이

사용되기 전이었는데도

그게 그렇게 헷갈렸다.

매번 유자차를 타고 싶다고

엄마께 조를 때마다 그건 유모차고

유자차는 먹는 거라고 알려주셨는데,

어느 순간 엄마도

포기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근래에는 삶이 고단한지

유달리 마구 부르는 일례가 늘고 있다.

우선, ‘아이더’와 ‘이디야’.

애용하지 않는 곳이어서 더 그런 걸까?

등산 용품을 보러 이디야를,

수박주스를 먹으러 아이더를 찾는 근원을

종잡을 수가 없다.

앞글자만 같다고 대충 부르는 경우도 있다.

헤어 손질에 최고인 에어프라이어와

고구마를 구워 먹는 에어랩이 대표적이다.

분류를 넘나드는 당당함에

듣는 이도 순간

무엇이 잘못된 건지 잊곤 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약과다.

다친 사람도 불쾌한 오해도 없으니.

내게는 지구 끝까지 가져가고 싶은

등골이 싸해지고 아찔한 경험이 있다.

오래된 얘기인데, 어느 날은

회사 동료와 다이어리 얘기를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추천하게 되었다.

링크를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구나무 서기로 봐도

많이 당황하고 고민한 듯한 답이 왔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몇 년을 내리 살 만큼 좋아하던 브랜드라

사이트를 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식 주소에

‘s’ 하나가 더 붙어 있었던 것.

그러니까

‘www.브랜드명s.com’이 공식 사이트

‘www.브랜드명.com’이 불법 사이트였던 것.

그래도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있어

크나큰 실수인 것으로 정리되었지만

(아마도, 제발)

십년이 지나도 그 순간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빨리 잊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의 일례를 더 소개한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엄마가 대학병원에 갈 일이 생겨

동행하지는 못하고 병원으로

마중을 간 적이 있다.

대학병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한한 대기 시간을 잘 보냈는지 묻자,

속상한 답이 돌아왔다.

“밀리의 세제가 로그인이 풀려서 못 읽었어.”

처음에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아, 세제! 전날 확인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걸 빠뜨렸네!”

대부분의 사람은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세제가 아니라 서재인 것을.

근데 또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책이란 때론 삶을 빡빡 빨아

씻어내기도 하고

엉킨 부분을 풀어주기도 하고

표백해서 새 선택의 기회를 주기도 하니까.

실수를 알아챈 후에는

엄마와 한참을 박장대소했다.

사는 게 다 그렇다.

글자 하나로 합법이 불법이 되고,

대문자 하나로 로그인을 못해

또다시 비밀번호를 재설정하고.

어법과 사전을 파괴하며

오로지 문맥만을 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순간을 좋아한다.

(한 가지의 일례는 아마 영원히 제외하고)

그런 오묘하고 아찔한 순간이 있어서

이렇게 또 하나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빡빡한 쳇바퀴 속에서도

피식피식 숨을 돌릴 수 있으므로.

사는 데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뿐이 아니라

일순간 힘을 툭 내려놓게 하는 사람,

사람이 제일이라는 걸.


by 개복사

월, 수, 금 연재
이전 10화129 조각. 행복 행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