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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조각
눈이 잊을 만하면 내린다.
지낼만한가 싶으면 한파라 춥다.
추울 땐 한파용 롱패딩을 입으며
추억에 잠긴다.
겨울의 기억은 김 서림처럼
조용히 다가왔다가 사라지곤 한다.
나는 패딩이 두 벌이다.
한파용 롱패딩과 숏패딩.
롱패딩은 따지고 보면
나의 첫 겨울 외투.
첫 회사를 다닐 때
큰맘 먹고 샀고
여전히 따뜻하다.
32만 원인가 36만 원인가.
할인해서 30만 원대였다.
요즘 필수품으로 따지면
블루투스 이어폰이나 스마트워치의 가격.
롱패딩이 있기 전에는 겨울 외투로
회색 코트가 한 벌 있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엄마가 미안하다며 사주셨던 건데
묵직한 무게에 비해 따뜻하진 않다.
그러니까 스무 살 이전에는
패딩이든 코트든 후드집업이든
아무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내 방은 냉장고를 두거나
물건을 보관했는지 난방이 되지 않았고,
침대도 전기장판도 없었다.
그런 건 전부 먹고 사는 데에
부차적인 것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집과 학교를 걸어 다녔다.
한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버스를 타긴 했지만,
겨울에는 웬만하면 참았다.
용돈이 없는 것도
무더위도 추위도 모두 참았다.
참을 수 없는 건 없었지만
서러운 건 있었는데,
심한 다한증이어서 겨울마다
피가 나도록 틑어지고 갈라지는 손이었다.
장갑을 써도 땀이 나니까
장갑과 같이 손이 얼었다.
다한증이라 손에 뭘 바르기도 어려웠다.
유일한 처치는 바세린이었다.
밤마다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바세린을
손에 얇게 펴바르고 비닐 장갑을 쓰고 잤다.
평소에는 조그만 교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가
미약한 온기를 손에 불어 넣으며 지냈다.
지금은 옛날만큼 춥지는 않다. 정말 그렇다.
가을 차림으로 한겨울 보내던 때에 비하면.
내가 태어났을 때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언제나 지금과 무엇을 비교하면 그렇다.
어떤 과거는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괴롭히지만,
어떤 과거는 조그만 웅덩이라
거울처럼 현재를 비춰볼 수 있고,
또 어떤 과거는 발돋움이 되어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엄마는 돈은 무서운 거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엄마가 주는
밥을, 방을, 옷을, 배움을 잘 받아다가
무섭지 않게 잘살게 열심히 배우라고.
돈 무서운 줄은 알되,
돈 무섭게 지내지는 말라고 했는데.
근데 어쩌지, 엄마.
고봉밥 먹으며 컸어도 어렵네.
돈은 무섭고. 세상은 얄짤없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은 과거는 없어.
단지 지금이 덜 춥기 때문이 아니라
진흙에 구르고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도
매 순간 사투를 벌였으므로.
아직 진행형이라고 생각하려고.
어쩌면 사는 내내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지난날의 나와 걷는 밤,
추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걷는 어린 나와
처음 산 패딩을 입고 출근하는 나와
덥게 입어서 오히려 땀을 흘리는 내가
함께 걷는 밤이 슬프지도
애틋하지도 않도록.
by 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