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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Mar 24. 2024

필리네, 자유분방함과 천박함 사이에서 인생을 즐기다.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등장인물 '필리네'이야기

     괴테의 소설을 읽다 보니,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생생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는 특별히 여성 캐릭터들이 풍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좋았다. 당당한 자의식과 주관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해서 만족감을 주었다. 테레제, 나탈리에, 나탈리에의 이모(어느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주인공), 필리네, 미뇽까지. 물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백작부인, 멜리나부인, 남작부인 등. 이름을 나열하고 보니 그 시대의 틀에 박힌 인식과 행동을 보여주는 여성은 모두 부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것도 작가의 설정인가?        


오늘은 '필리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필리네의 자유분방한 이미지는 오페라 <카르멘>의 여주인공 카르멘을 연상시키는데, 카르멘보다는 훨씬 지혜롭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필리네는 소설 제2권 4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주인공 빌헬름은 어느 도시의 여관 앞에서 서성이다가 꽃을 파는 소녀에게서 꽃을 한 다발 사서 감상하고 있었다. 건너편 여관에 묵고 있던 필리네는 창밖으로 그를 발견하고 유심히 살펴본다. 그녀는 그를 떠보기라도 하려는 듯, 소년을 보내서 꽃을 한 송이만 달라고 부탁한다. 빌헬름도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금발에 아름답고 유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었다. 빌헬름은 기꺼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전부 보내주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필리네는 빌헬름의 머리를 직접 손질해 주었고, 동료 남사친 라에르테스와 셋이서 어울릴 때도 빌헬름에게 유난히 적극적인 스킨십을 다. 어쩌면 필리네는 빌헬름이 부유해 보여서 더 큰 관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새로운 물주로서. 그녀는 가진 것이 얼마 없었기에 돈 많은 남성을 구슬려서 이용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인색하게 굴지 않았고 돈을 아끼느라 인색하게 구는 사람들을 몹시 경멸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매력적인 여배우였던 필리네는 다소 답답한 구석이 있었지만 진지하면서 잘생긴 청년인 데다가 씀씀이가 호탕한 빌헬름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빌헬름이 가엾은 미뇽을 위해 극단장의 멱살을 잡고, 미뇽을 구하기 위해 큰돈을 지불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명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그녀는 빌헬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빌헬름에게 여러 번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쳤다. 빌헬름도 처음에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필리네에게 매료되었다. 한두 번은 그녀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근심들이 필리네에게 향하는 빌헬름의 발걸음을 붙잡곤 했다. 게다가 필리네의 천박해 보이는 행동들은 빌헬름이 그녀를 혐오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면, 필리네는 백작 댁의 마방 관리인을 유혹해서 그녀가 좋아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년이 마방 관리인과 결투를 하게 만들었고, 백작 부인에게 지나치게 비굴하게 굴어서 다른 극단원들이 비참하게 지내는 동안, 혼자서만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였다.


빌헬름은 그녀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반면 필리네는 빌헬름이 자신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자신의 유혹을 거절해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을 구걸하거나 애원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감정 안에 머물기에는 그녀의 영혼은 지나치게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물론 빌헬름이 열정적으로 구애하였다면 필리네가 구애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오래가지는 못했겠지만. 구속을 싫어하는 필리네에게 영원한 사랑의 꿈을 꾸는 빌헬름의 열정은 맞지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빌헬름을 놀려먹곤 했으며, 빌헬름이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졌을 때는 두 사람의 만남을 도와주기도 했다.


필리네는 성적으로는 빌헬름을 유혹했을지 몰라도 진지한 사랑의 감정을 나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몸을 바쳐 그를 돕기도 다. 빌헬름이 극단원들을 인솔하여 도시를 이동하기 위해 여행할 때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마는데, 필리네는 빌헬름의 돈이 들어있는 자신의 가방을 지키기 위해 강도들의 두목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나중에 이 일은 극단원들에게 경멸을 받는데, 빌헬름은 그녀 덕분에 자신의 소중한 돈을 지킬 수 있었다. 자기의 실책 때문에 극단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빌헬름은 필리네의 가방에 보관된 돈을 극단에 전부 내놓으려고 하는데, 필리네는 빌헬름이 어리석은 짓을 못하게 강하게 막아내기도 한다. 빌헬름은 강도들에 대항하느라 크게 다치고 마는데, 극단원들이 모두 마을로 도망친 뒤에도 필리네만은 어린 소녀 미뇽과 함께 다친 빌헬름 곁에서 그를 돌본다. 필리네는 이처럼 연극에 진심인 빌헬름의 일상에 큰 도움을 주고 곁을 지키면서도 그의 마음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다만 마을에서 다친 빌헬름을 치료할 때에 사람들이 둘을 부부로 오해하자 당연한 듯 그것을 즐긴다. 이후에 빌헬름과 극단은 햄릿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자축연을 하게 되는데, 빌헬름이 만취한 상태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필리네는 그의 뒤를 쫓아가 만취한 빌헬름과 하룻밤을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킨다.


이후 필리네는 제1부의 끝부분에서 빌헬름을 다시 한번 쩔쩔매게 하면서 그의 곁을 떠난다.

그녀를 찾아온 청년(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소년시절부터 곁에 머물다가 어느 날 사라졌던 프리드리히)이 빨간색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빌헬름은 그 제복이 첫 연인 마리아네의 것과 똑같아서 혹시 마리아네가 아닌지 의심한다. 필리네는 그의 열망에 부합해 주느라, 제복의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네인지 빌헬름이 묻자 그렇다고 대답해 준다. 하지만 빌헬름이 제복을 입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끝까지 거절한 채 빌헬름 몰래 떠나버려 빌헬름을 절망하게 만든다. 빨간 제목의 장교가 마리아네가 아닌 것은 2권 끝부분에서야 프리드리히의 설명에 의해 밝혀진다. 필리네가 빌헬름의 아이를 임신한 것도. 필리네는 빌헬름과의 사랑은 맺어지지 못했지만, 자유분방한 삶의 코드가 맞아떨어지면서 자신의 임신한 모습마저도 사랑하는 청년 프리드리히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필리네는 머무는 곳 어디서나 사람들 사이에 윤활유가 되어주는 존재였고, 특히 남자들을 즐겁게 해 줄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결코 남자들에게 예속되지는 않는 삶을 살았다. 가끔은 천박해지기도 지만, 멋들어진 춤과 노래로 대중을 휘어잡을 줄도 아는, 그러면서도 지나친 욕심으로 자신을 파멸시키지도 않는, 그런 여성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자들이 늘 자기 자신과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부르던 노래를 옮겨 적어본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즐길 줄 알았던 문학 속의 한 여성을 추억하며. ^^


밤의 고독에 대해서

슬픈 가락으로 노래하지 말아요!

아니, 아니야, 아름다운 님들이여, 밤은

함께 재미있게 지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랍니다.


여자가 남자의 아름다운 반쪽으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밤은 인생의 반쪽,

실로 아름다운 반쪽이랍니다.


기쁨을 중단시켜 놓기만 하는 낮이

여러분은 반가운가요?

기분전환에는 좋지만

뭔가 다른 일에는 쓸모가 없지요.


그러나 밤은 달콤한 등잔불이

희미하게 흐르는 시간,

입에서 입으로

장난과 사랑의 말이 흐르는 시간.


여느 때에는 사납고 불같이 서두르는

성급한 악동도

살짝 선사해 주곤 하는 입맞춤에 취해

순진한 장난에 빠져드는 시간.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꾀꼬리가 사랑스런 노래를 불러주면,

갇혀 있는 사람, 우울한 사람들한테만

그 노래가 아프고 슬프게 들리는 시간.


고요와 평안을 약속하며

신중하게 열두 번을 치는 종소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의

심장의 고동 소리, 편안도 하여라!


그러니, 긴긴 낮 동안에는 명심해요,

사랑하는 사람이여,

낮은 괴로움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밤이 즐거움을 안고 온다는 것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486~488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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