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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Mar 01. 2024

미뇽, 운명에 지지 않을 거야!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등장인물 '미뇽'에 대한 이야기

   괴테의 장편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읽고 나니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중 '미뇽'이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뇽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소녀의 삶이 너무나 기구하고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냉혹한 찬바람에도 끝까지 매달려 있는 마지막 잎새 같았다. 게다가 소녀의 부모의 삶은 더욱 비극적이었으니.


   미뇽의 삶은 이랬다.

   미뇽이 태어나 자라면서 보니 남들에게는 다 있는 아버지가 곁에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돌보는 것에 무관심했다. 결국 아이는 어머니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호숫가의 어느 부부에게 보내져 길러지게 되었다. 미뇽은 독특한 성격에 노래와 재주넘기 등을 잘했다. 미뇽은 집에서 아주 먼 곳까지 걸어가서 놀다 오곤 했는데, 한 번은 너무 멀리까지 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어느 곡예단에게 구출된 미뇽은 집에 데려다 달라고 집주소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그런데 곡예단 사람들은 미뇽을 집에서 더욱 먼 곳으로 데려가 다시는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미뇽을 학대했으며 미뇽이 곡예단을 위해 기묘한 춤을 추도록 시켰다. 절망한 미뇽은 다시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성모마리아께 맹세했으며 아무도 믿지 않고 하느님의 가호 아래 살고 죽겠다고 결심했다. 미뇽은 사내아이처럼 옷을 입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곡예단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한 번은 어느 도시의 여관 계단 앞에서 미뇽이 곡예단장의 심한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다. 관중 앞에서 곡예단장이 시키는 달걀춤을 추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미뇽이 매를 맞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때 한 신사가 달려와 곡예단장의 멱살을 죽일 듯이 움켜쥐며 당장 아이를 놓아주지 않으면 법정으로 끌고 가 아이를 어디에서 훔쳐왔는지 밝혀내겠다고 위협했다. 미뇽은 드디어 곡예단장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달아날 수 있었다. 다음 날 곡예단이 떠난 뒤 미뇽은 신사를 찾아갔고, 신사가 돈을 지불하고 곡예단장에게서 자신을 샀다는 것을 알았다. 미뇽은 신사의 이름이 빌헬름이며 선하고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뇽은 신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하려고 애썼으며 신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미뇽은 신사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하프 타는 노인에게 음악을 연습시켜 신사 앞에서 자신의 묘기를 곁들인 달걀춤을 춰 보이기도 했다. 신사 빌헬름은 그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어 그녀를 보살펴주었다. 미뇽은 고향 이탈리아를 몹시 그리워하여 치터를 타면서 그리움을 담은 노래를 해서 빌헬름을 감동시켰다. 미뇽은 빌헬름에게 혹시 이탈리아에 가게 되거든 자신을 꼭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래의 시는 위 책 제3권 1장 첫 부분에 소개된 괴테가 <미뇽>이라고 이름 붙인 시인데, 미뇽이 치터를 타면서 부른 노래의 가사이다.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서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오며

협죽도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곳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 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들이 날 바라보면서,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고

물어주는 곳,

                                      그곳으로!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보호자여!


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

노새가 안갯속에서 제 갈길을 찾고 있고

동굴 속에선 해묵은 용들이 살고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

폭포수 쏟아져 내리는 곳,

                                      그곳으로! 그곳으로

우리의 갈길 뻗쳐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222~223페이지 중에서)



   이후 미뇽은 빌헬름의 여정(극단원들과 함께 연극을 공연하러 다니는)에 함께 했다.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싸우게 되었을 때 빌헬름이 위험에 처하자 뛰어들었다가 크게 다치기도 했다. 불쌍한 하프 타는 노인도 빌헬름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소녀는 끊임없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 노인을 무서워하면서도 많이 의지했다. 빌헬름을 향한 마음 때문에 힘들 때면 노인에게 찾아가서 위로를 얻었다. 노인과 함께 빌헬름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빌헬름이 위험에서 도움을 준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자 미뇽은 노인과 이런 노래를 불렀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혼자, 그리고 모든 즐거움과 담쌓은

곳에 앉아

저 멀리 창공을

바라본다.

아, 날 사랑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먼 곳에 있다!

이 내 눈은 어지럽고

이 내 가슴 타누나.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나의 이 괴로움 알리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1> 366페이지 중에서)


   빌헬름은 미뇽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으며, 하프 타는 노인도 보호하고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뇽은 빌헬름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지만, 무대에서의 공연만은 거부했다. 미뇽은 빌헬름을 점점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 커진 미뇽은 기회를 보아 빌헬름의 침실에 잠입할 마음을 품었다.  햄릿 연극의 대성공 후 만취한 빌헬름이 있는 방에  들어갈 기회가 찾아왔지만 빌헬름을 짝사랑하던 여배우 필리네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미뇽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미뇽은 심장이 약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발작을 일으켰는데, 이날 미뇽은 하프 타는 노인 앞에서 끔찍한 발작을 일으키고 말았다.

  미뇽은 이 일 후에는 빌헬름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마이스터 씨!'라는 이름으로 정중하게 대했다. 하프 타는 노인이 영혼을 짓누르는 불행과 환각 증상으로 (나중에 빌헬름의 아들로 밝혀지는) 펠릭스를 죽이려 했을 때는 미뇽의 적극적인 대처로 아이를 살리고 노인도 끔찍한 죄를 짓지 않게 만들었다. 미뇽은 특유의 신비한 감각으로 펠릭스가 빌헬름의 아들인 것을 직감하고 펠릭스를 정성을 다해 돌보았으며, 펠릭스와 늘 함께 있고 싶어 했다. 나중에 빌헬름이 미뇽과 펠릭스를 남겨두고 여행을 떠나자 그녀는 점점 건강이 나빠졌다. 여러 달이 지난 뒤 빌헬름이 미뇽과 아이를 데리러 왔다. 빌헬름은 미뇽의 병 구완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그녀를 맡겼다. 빌헬름의 보호 아래 다시 지내게 된 미뇽은 평안한 시간을 보냈지만 건강이 회복되지는 못했다. 심장이 지독히 안 좋아져 절대 뛰어서는 안 되는데도 빌헬름에게 달려오느라 무리하게 뛰어온 것 때문에 혼이 나자 미뇽은 이렇게 말했다.


"터져버리라지요!" 하고 미뇽이 깊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벌써 너무 오랫동안 뛰었는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2> 321페이지 중에서)


  이 일이 있은 후  미뇽은 결국 쓰러져 죽고 말았다. 미뇽의 위령미사는 넓고 웅장한 홀에서 합창대의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엄숙하게 치러졌다. 장례에 참석한 이탈리아 귀족이 미뇽이 자신의 조카라는 것을 알아본 뒤, 그녀 부모의 비극적인 사연이 숙부에 의해 전해졌다.

   미뇽의 아버지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여인은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부모가 같은 여동생이었다.(부모가 늦둥이 딸이 부끄러워 입양 보냈던 것이었음) 이것을 알게 된 형제들의 계략으로 미뇽의 아버지는 여인과 맺어지지 못한 채 수도원에 갇혀 실성한 모습으로 살게 되었다. 미뇽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은 뒤 절망에 빠져 살았다. 그녀는 미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미뇽이 행방불명되자 사람들은 그녀가 호수에 빠져 죽은 것으로 생각했음) 미신에 의지하여 미뇽을 다시 살리기 위해 기이한 행동들을 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미뇽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미뇽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온 그 모든 불행을 온몸에 짊어진 채 한없이 슬퍼하며, 죽지 못해 사는 노인의 모습으로 하프를 연주하면서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빌헬름을 만나 돌봄을 받게 된 불쌍한 하프 타는 노인이 바로 미뇽의 아버지였다. 미뇽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버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노인은 빌헬름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은 뒤 거의 정상에 가까울 만큼 회복되었지만, 자신과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뒤늦게 알게 된 데다가 자신의 잘못으로 빌헬름의 아들이 죽을 뻔한 일이 다시 생기자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미뇽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읽노라면 사람이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한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삶에 대한 열정만큼은 타인이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모든 것을 구속하려고 해도, 운명이 아무리 한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가도 구속할 수 없는 개인의 자아, 내면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미뇽이 그랬다. 저주받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불행한 인생을 짧게 살다 갔지만 삶에 대한 애착과 열정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컸던 아이였다. 사악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한 깊은 슬픔이 빌헬름을 만나서 치유되고 새로운 소망을 품게 했다. 하지만 빌헬름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고 그녀가 빌헬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사랑은 제한된 것이었다. 하프 타는 노인을 통해서도 큰 위로를 얻었지만 그녀의 인생을 충만하게 채워줄 수는 없었다.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나만의 삶. 미뇽은 어렸지만 이것을 알았기에 슬픔을 극복하면서 삶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한 것이 아닐까?


    미뇽과 하프 타는 노인은 소설의 2권부터 8권까지 주인공 빌헬름의 여정에 함께하면서 빌헬름의 보호를 받고, 빌헬름에게 위로를 주는 관계로 계속해서 등장한다. 소설을 읽을 때, 두 사람은 그저 빌헬름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 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끝까지 읽고 보니 이 두 사람은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은 불행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겪는 사람들을 품어주고 싶은 작가의 선의를 담아내기 위해 등장시킨 가련한 민중의 모습 같았다. 


아! 낯선 이들에게 납치되어 어딘가로 끌려다니며 원치 않는 일을 하며, 매를 맞으며 사는 삶은 얼마나 끔찍하고 괴로운가! 이 고통을 굳은 의지와 신앙심으로 버티고 있던 미뇽에게 빌헬름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죽고 아이마저 죽은 것으로 알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인가! 하프 타는 노인으로 불리던 미뇽의 아버지에게 빌헬름은 구세주였다. 두 사람은 빌헬름을 만남으로 인해서 기쁨과 행복을 맛볼 기회를 얻었다. 이들이 빌헬름을 만나는 행운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 삶은 비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괴테는 두 사람과 빌헬름의 관계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참 도움과 사랑을 줄 수 있는 고매한 인격의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갑자기 불어닥치는 불행, 그 불행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 혹은 사회의 관심과 선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미뇽!  미뇽! 소녀의 삶이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미뇽을 모티브로 한 오페라까지 만들어졌겠는가! 오페라는 등장인물의 이름만 비슷할 뿐  다른 내용이었다.


오페라 <미뇽>에 나오는 아리아를 공유한다.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이라는 제목의 아리아인데, 위에 소개한 미뇽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https://youtu.be/rAWBXS5aqrY?si=NBAiMZCcjFYWDA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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