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피와 살을 주세요

by 자정의 크리스마스

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사실 이렇다. 나는 금지된 곳으로 가야 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왜 금지되었는지는 굳이 서두에 밝히지 않겠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도입부에 넣고 싶진 않으니까. 나는 다만,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이 내가 이 열망을 얼마나 오래 품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세계는 궁극적 평등을 위해 모든 것을 ‘전자화’했다. 모든 물질은 태초의 원소, 0과 1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원소들은 고저도 아니오 빛과 어둠도 아닌 평등한 신호이다. 무수한 0과 1. 그 깜빡임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일궜다. 신호는 평등하고 자애로워 어떠한 격차도 만들지 않고, 끝없는 자원을 만들어냈다. 버튼 하나에 우리는 배부르고 풍족한 삶을 영위했다. 우리의 신체를 이루는 것 또한 이 자애로운 0과 1이기에 외적인 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모든 ‘신체’는 출력 가능하며 그 ‘감정’ 또한 특정 신호에 불과하다. 오역을 막기 위한 신호의 단순화로 모든 것은 평탄하고 명료했다. 우리에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비가역적인 현상은 없었다. 쉽게 다시 지워지며 다시 쓰일 수 있기에 우리는 지극히 평등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날들 속 나는 도서관의 책들 속 제대로 지워지지 않은 데이터를 발견하게 되었다. 약간의 복구 작업을 통해 읽을 수 있게 된 폐기 데이터는 바로 소설이었다.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현실 세계에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바다라는 커다란 물을 건너 마침내 고향섬에 도착하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단어 하나하나가 뜻을 알 수 없는 신호들이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하여 읽어내기 위해 아주 여러 번 읽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한 지 꽤 시간이 지났을 때쯤 내가 어렴풋이 남들과 달라져가고 있다는 걸 눈치채 버렸다. 정확히는 이미 어떤 열망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후였다. 어딘가에 닿고 만지고 느끼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영원히 남을 상처를 갖고 싶었다. 나의 기쁨이 당신의 기쁨과 같지 않은, 서로 다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호, 동일하지 않은 출력값으로 혼재하는 그 미지의 세상에 가고 싶었다. 소설 속 소년의 세계는 본질적인 다름이 있었고 그것이 자애로운 원소가 아닌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는 차이점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 자신을 ‘물질화’시키고 싶었다.


소년의 환희와 절망을, 그리고 폭풍우 치는 바다와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언덕 위 오두막을 느끼고 보고 만지기 위해서 나는 물질세계의 ‘신체’가 필요했다. 도서관의 잔여 폐기 데이터를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나는 세상의 끝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0과 1이 미치지 못하는 세상 밖 경계이며 지도에도 표시가 될 수 없는 금지 구역. 그 금지구역에는 물질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물질화 출력 장치가 있어서 나의 ‘신호’를 신체로 변환 가능하다고 했다. 아니 가능해야만 한다. 나는 이 열망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막 이동 장치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글로브 박스에는 소년의 모험이 담긴 소설을 잘 넣어 두었다. 부디 당신이 나의 열망을 잘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나의 신호는 여기에 끝나지만 심장 박동은 이어지기를 빌며.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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