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프로텍터로서의 삶을 산 지 8개월쯤 되었다. 8개월 간 우리 가족에게로 커다란 불행이 눈덩이처럼 불어 굴러오는 것을, 시지프스처럼 들쳐 매고 밀어내고 저 꼭대기까지 올려 다음으로, 또 그다음으로 넘겨버렸다. 작년 6월 아버지가 아프셔서 마지막을 지켜야겠다고, 가족 옆에 있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회사를 아주 급하게 그만둘 때에, 당시의 팀장 대리이시던 부장님께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는 할 수 있는 감정표현이 울기 밖에 없어서 울어버렸지만 속으로는 말도 안 되는 위로라고 생각했다. 지금을 생각해 보니 일어나 버렸다, 기적.
정신 차려보니 졸지에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버렸다. 어머니가 20대 초반, 채 몇 년도 되지 않을 직장 시절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또 얼마나 멋졌었는지를 이야기하실 때마다 저게 저렇게 또렷하실까 생각했는데, 철없는 생각들은 다 부메랑처럼 돌아와 결국 나를 깨우치고 자라게 했다. 지금의 내가 그렇다. 26살 겨울에 직장일을 시작하여, 나는 많이 쳐줘야 경력 5년 차이다. 친구가 되어 가끔 만나는 직전 회사 후임도 이제 곧 있으면 나보다 해당 직무 경력이 길어질 것이다. 창호지 같은 마음에 구멍이 생겼다. 바람이 불면 가끔 구멍 사이로 후후 찬기운이 몰려온다. 이제야 일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현재 직장은 집이다. 인천의 모 역 앞 5분 거리 아파트에 나의 사무실이 있다. 가끔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바깥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의 직업을 생각하면 간병인 내지는 주부 같다. 삼시세끼 밥과 약을 먹어야 하는 아버지와 청결과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어머니 밑에서 구르고 깨지며 집안일을 우당탕탕 해냈다. 아버지는 뭐든 싱긋싱긋 다 고맙다 잘 먹었다 해주시지만 어머니는 내게 호되다. 그녀의 업무 방식과 고지식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서로 지긋지긋 부딪혔다. 하지만 결국 ‘여기는 회사야, 일터야‘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회사는 일을 위한 일과, 절차를 위한 절차도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오래된 관습도 많다. 집도 같다. 어머니가 내 상사이고, 여기가 회사라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 뒤로는 마음이 편해지고 드디어 온전히 홈프로텍터라는 직함도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집안일은 부지런함이 티가 나지 않는 치열한 현장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상사가 혼자 독박을 쓰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찾아서 해야 하는... 우리 집은 전형적인 중소 회사의 꼴이다.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는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이제 내가 하기 어려운 수준의 간병이 필요하지 않았고 삼시세끼 따뜻한 밥만 차려내면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등 떠밈으로 마침내 그녀는 고향집으로. 엄마의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던 나의 어머니는 훌훌 남쪽 바닷가 마을로 명절을 쇠러 갔다. 북적한 고향집에서 또 소처럼 일할 어머니를 상상한다. 집 떠난 지 하루가 지나 영상통화를 해보니, 그녀 미간의 주름이 그새 없어졌다. 일주일을 설레하더니 물을 준 초록 잎들처럼 부풀고 곧아진 싱그러운 모양새이다.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가 떠나 조금은 심심해진 집에서 둘이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한다.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그만의 기발함과 유머가 가득하다. 나는 아버지가 60세 이실 때 처음 알게 되어 노년의 삶만 관찰해 왔었는데, 설날 동안 한 아버지 당신의 이야기에서는 4살, 군대 간 날, 20대, 30대, 40대,50대의 아버지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도 내 또래의 아버지는 아직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자꾸 얘기를 하면 그때 서울에서도 다 농사를 지었다고 하신다. 밥상에 앉아 당신의 바쁘신 성격대로 빠르게 드셨어도 늦게 먹는 나를 기다리며 젊은 날의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 가족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의 휴가 덕에 우리는 늦은 나이에 만나 가족이 된 해후를 푼다. 곧 있으면 이제 저녁이고, 나는 홈프로텍터로서 저녁 메뉴가 고민이 된다.
다들 즐거운 설날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