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여리는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원래 보이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제 낮에 사고에 관해 물어보러 온 사람은 회색으로 보였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할까…… 아우라? 그 사람 주위로 분무기에서 뿌린 물처럼 색이 번져 보이는데 온통 회색이었어요. 그 사람이 왔을 때는 막 깨어난 뒤라서 기분도 좋지 않았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색에 가까운 회색 연기 때문에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그 뒤에 간호사가 왔을 때도 보였죠. 연한 녹색.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맑아지면서 이 색들이 나에게 무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오빠는 진한 파란색이에요. 색을 보자 믿어도 된다는 확신이 섰어요. 그리고 용감하다는 느낌도 들었죠. 파랑 언니는 연한 노란색이었어요. 그 언니가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건 괜한 말이 아니에요. 오빠와는 분명 다르지만, 그 언니에게도 믿음이 존재했어요.
그래서 언니와 살고 싶다고 말한 거예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새로운 능력이야?”
석헌의 말에 여리가 웃었다.
“시각 장애인이 하루아침에 볼 수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언니랑 오빠는 무슨 관계에요? 둘이 결혼해요?”
천진난만하게 묻는 여리의 질문에 석헌은 당황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오빠는 언니에게 다른 감정을 갖고 있잖아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에요? 전 그렇게 보였는데?”
“보였다고? 우리가 그렇게 보였어?”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배우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오빠와 언니를 보고 그렇게 느꼈어요. 언니도 오빠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석헌은 여리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눈이 커졌다. 여리가 석헌을 마주 보았다.
“오빠와 언니가 함께 서 있을 때, 둘의 색이 겹쳐요. 부드럽게 섞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어제 왔던 사람. 짙은 회색을 띠고 있던 사람. 그 사람의 색은 누구와도 섞이지 않았어요. 여기에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 언니들도 간혹 섞이긴 했지만 대부분 혼자 색이 나오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언니가 왔을 때도 그랬어요. 하지만 오빠랑 언니는 달랐어요. 가장자리가 일렁이며 거리낌 없이 섞였어요. 그래서 둘이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제부터 보였던 거야? 그…… 색이라는 게?”
석헌의 질문에 여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더니 이불에 올려놓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사실…… 저도 어제까지 몰랐어요.”
“뭘?”
여리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석헌은 시간을 주었다. 기다리기로 했다.
망설이던 여리가 마음을 먹었는지 고개를 들고 석헌에게 말했다.
“제가 적록색맹이었다는 걸요. 아빠가 적록색맹이었고 제가 그걸 물려받았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전 딸이죠.”
석헌은 여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색맹이라고?”
“네.”
“……어제 간호사한테 연한 녹색을 봤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여리가 석헌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이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이해를 못 하는군요.”
“뭘?”
석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사람마다 다른 색을 보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 이유를 안단 말이야?”
“이유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 뭔데?”
“지능과 함께 받은 거요. 사고로.”
“그게 뭔데?”
“자꾸 모른 척할 거예요?”
아이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석헌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른 척이 아니라 정말 몰라서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제발 알아듣기 쉽게
설명 좀 해줄래?”
석헌의 말을 들은 여리가 숨을 들이마셨다.
크게 한 번 숨을 내쉬고 나더니 다짐한 듯이 말했다.
“저희 아빠는 적록색맹이고 딸인 제가 물려받았어요. 알겠어요?”
석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리가 석헌의 반응을 살피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 그 간호사한테 처음으로 녹색을 봤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적록색맹인 것조차 몰랐어요.”
“그래?”
“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여자인 제가 적록색맹이었어요. 사고가 난 지금 전 제4색각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제4색각?”
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해가 됐어요? 라고 하는 표정으로.
하지만 석헌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제4색각이 뭔데?”
“하……,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색을 보는 거예요.”
“뭐?”
“제가 사람마다 고유한 색을 읽어내는 것이……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내는 색이 자외선과 함께 내 눈으로 들어오는 거죠. 하지만 일반 사람은 자외선을 볼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저만 보이는 거 같아요.”
설명을 해줘도 석헌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외선을 본다고?
“물론 개개인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 색으로 보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저는
그게 보여요. 오빠는 저 태양이 무슨 색으로 보여요?”
석헌은 고개를 돌려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맞아요. 그게 일반적인 사람에게 보이는 색이죠. 하지만 적록색맹이었던 저는 얼마 전까지 저 색이 붉게 보이지 않았어요. 그냥 누르스름? 하지만 지금 태양은 오빠가 말한 색 외에 가장자리로 갈수록 보라색과 짙은
갈색, 분홍색까지 섞여 보여요. 이해됐어요?”
여리가 묻자마자 석헌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들을수록 이상한 말이었고, 지금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혀 모르겠어.”
“네, 그렇게 보여요.”
여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뭐야?”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해 낸 거예요. 오빠는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 앞을 보면서 사고 일부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어요. 언니는 들을 수 없었는데 마찬가지로 앞으로 일어날 사고에 대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고요. 그렇죠?”
“그래.”
“저는 지적 장애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빠보다 더 많이 알고,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잖아요.”
“……맞는 말 같긴 한데 직접 그렇게 얘기할 거야?”
석헌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단 사실만 말하는 거예요. 아무튼 겉으로 드러난 것은 지적 장애였어요. 적록색맹은 저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오빠나 언니와 마찬가지로 색맹이 고쳐진데다 더해 제4색각까지도 볼 수 있게 됐어요.”
여리는 말을 멈췄다. 석헌은 여리가 다음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잘 모르겠어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지만 우리는 사고와 함께 이상한 능력을 받았어요. 앞으로 크든 작든 사고는 계속 일어나겠죠. 우리의 이런 능력이 앞으로 일어날 사고를 막는 데 도움이 될까요?”
“너는 우리가 사고를 막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어요.”
“도대체 누가? 신이 우리를 선택해서 이런 능력을 주기라도 했단 말이야?”
“글쎄요. 모르죠.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하잖아요. 우리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다 같이 외계인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르고요.”
“외계인?”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제 말은 우리가 겪은 일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좋은 곳에 쓰자는 말이에요.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다음 사고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석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알고 있어. 하지만…….”
“쉽지 않죠. 알아요.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헌이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시간이 다 됐네. 가봐야겠다.”
“오빠한테 바라는 건 하나예요. 나를 언니와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인천에 할머니가 있어요. 할머니를 법정 후견인으로 지정해서 언니와 살 수 있도록 부탁해 볼게요. 우리는 떨어지면 안 돼요. 언제든 정보를 교환할 수 있어야 해요. 지극히 제한된 정보로 사고를 막으려면 이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