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린 환청
“여리는 어때?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있어?”
“응.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야.”
파랑이 웃으며 대답했다.
“공부는? 1등 해?”
“아니. 1등은 아니래. 1등 하려고 공부하는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양보하는 거야?”
석헌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응. 그런 모양이야. 오늘 반 배정 나온다고 아침부터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어. 오빠는 어때?
올해는 뭐 심을 거야?”
“음…… 네가 좋아하는 브로콜리?”
“응? 내가?”
석헌의 농담에 파랑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오빠가 지난번에 사다 준 망개떡도 맛있었는데.”
“다음에 올라갈 때 또 사 갈게.”
잠시 대화가 멈췄다가 석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뭐…… 들리거나…….”
“아직 없어. 오빠는?”
“응. 나도. 아직 없어. 이대로 없었으면 좋겠다.”
“나도. 이렇게 여리랑 아무 일 없이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파랑은 한참이나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석헌은 이렇게 매주 안부 전화를 걸어온다.
고마우면서도 씁쓸하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를 보거나 듣는 능력은 절대 신의 축복이 아니다.
작고 미세한 소리라도 놓칠까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자신이 놓친 작은 소리 때문에 사고를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가끔 파랑을 짓눌렀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뒤 돌아 확인하는 파랑을 본 여리는 고개를 저었다.
“언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언니는 이미 소리를 들어 봤다면서. 그 느낌이 있을 거야.
그걸 기억하면 돼.”
대범하고 쿨한 여리와 함께 살면서 소심한 파랑의 성격도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이모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혼자 쓸쓸히 지내던 집에 고작 열 살 아이
하나가 더 들어왔다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파랑은 빵 굽는 법을 마저 배웠고, 석헌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제법 농사꾼다운 면모가 나타났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석헌은 쑥스러워했다.
1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지능은 높았지만, 한글도 제대로 몰랐던 여리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학교 교육 과정을 그대로 흡수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아이였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쏠릴 것을
염려해 적당한 완급조절로 사회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분명 또래 아이들보다 똑똑할 것이고, 아는 것도 많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여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리는 고개를 흔든다.
“아니야. 난 그 아이들처럼 ‘배우고’ 있다고. 그리고 괜히 눈에 띄고 싶지도 않고.”
여리와 처음 살 게 됐을 때만 해도 휴대폰으로 의사전달을 했던 파랑 역시 여리의 도움으로 점차 입이 트였다. 여리는 쉽게 설명해주고, 자주 격려해 주었다. 가끔은 누가 언니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전히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지만, 그 어떤 일도 석헌과 파랑, 여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셋은 각자 자기 일을 하며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여리가 벌써 5학년이 된다.
산사태로 부모를 잃은 지 1년 5개월이 지났다. 고맙게도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 학교에서 문자 안 왔어?”
아침부터 여리가 파랑을 재촉한다. 파랑이 웃으며 다시 휴대폰을 확인한다.
“응. 학교에서 문자 보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잖아.”
“벌써 여덟 시잖아. 방학이라고 게으름 피는 거 아니야?”
“조금 더 기다려봐. 연락이 오면 바로 알려줄게.”
“아…… 오늘 그거 때문에 일찍 일어났는데……. 언니, 오늘 몇 시에 와?”
“음……. 5시에 끝나.”
파랑은 얼마 전부터 집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늘은 2월 20일. 이제 5학년이 된 여리의 반 배정 문자가 오는 날이다. 같은 나이인 열두 살 친구들에
비해 지능이 높은 여리는 친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반 배정에 민감했다.
“학교에서 연락이 오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야 해.”
“알았어.”
그런 여리가 귀엽다. 학교에 좋아하는 남자아이라도 생겼나?
파랑은 웃으며 대답을 하고, 아르바이트 갈 채비를 마쳤다.
“점심때 라면 먹지 말고, 밥 먹어. 혼자 먹기 싫으면 나 있는 빵집으로 오고.”
“됐어.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먹을게.”
여리는 파랑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충 대답했다.
파랑이 흘끗 텔레비전을 보자 근처 중소도시에 프리미엄 아울렛이 새로 생긴다는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또 그런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 늦어.”
“점심 먹었는지 확인할 거야.”
“엄마처럼 왜 이래. 알았다고.”
여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파랑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파랑이 웃으며 여리에게 떠밀려 나갔다.
“진짜. 진짜 확인한다?”
“알았어.”
계단을 내려오는 파랑의 발걸음 소리가 벽을 타고 울린다.
행복했다.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살을 맞대고 살 수 있는 작은 꼬마 숙녀가 있어서 행복했다.
이모와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이 행복을 이모가 보내준 것은 아닐까?
분명 파랑에게도 되돌리고 싶고,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지만 똑똑한 꼬마 숙녀와 함께 남은 시간을
채워가는 느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주는 자애로움 속에서 사고에 대한 기억이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예지의 불안도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다.
바쁜 오전 시간이 끝나고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빵집은 버스 정류장에서 불과
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직 2월인데도 파랑은 살짝 더웠다. 그만큼 바쁜 시간이었다.
머그잔에 시원한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아마 여리의 반 배정 문자일 것이다. 잠금 해제를 하고 문자를 보기 위해 휴대폰 액정을 터치하는 순간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인파가 가득한 곳에서 났음 직한 소리. 파랑은 휴대폰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주위가 조용했다. 눈을 들어 작은 매장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출입문에 달린 종은 미동도 없었다.
방금 소리를 들었는데……. 파랑은 출입문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냅다 문을 열었다.
아직 찬 겨울바람이 매장 안으로 불어오자 파랑은 한기를 느꼈다. 하지만 파랑이 한기를 느낀 것은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좌우를 둘러봐도 빵집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랑아, 거기서 뭐 하니?”
사장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파랑은 출입문을 닫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사람들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그래?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갔어?”
“아니요, 제가…… 잘 못 들었나 봐요.”
“지금 손님 좀 빠졌으니 잠깐 쉬고 있어. 어제 만든 빵은 여리한테 갖다주고. 카운터 아래에 넣어뒀다.”
“네, 감사합니다.”
파랑은 대답했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사장님이 눈치를 챘는지 파랑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오늘은 빵이 조금 빨리 빠졌구나. 조금 있으면 마들렌이 다 식으니 포장 좀 부탁한다.”
“네.”
사장님이 파랑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파랑은 다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서울향라초 학반 배정 안내] 귀하의 자녀는 5학년 1반으로 배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