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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Oct 29.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여리의 이야기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석헌과 파랑을 번갈아 보더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도 이제야 제대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깨어났을 때는 정신이 없었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화가 나 있었어요. 머리를 다친 모양이에요. 머리가 굉장히 아팠거든요. 

그들이 와서 사고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을 때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게 더 화가 났어요.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래?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솜이’가 보고 싶었어요. 아! 솜이는 제 인형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들고 다니던 인형이요. 아무튼……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저는 솜이 생각만 났어요. 그 사람들은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저는 알고 있었어요. 그들이 실망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어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저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요.”


여리가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알을 굴리더니 파랑을 보고 말했다.


 “언니, 목이 말라요.”


파랑은 흠칫 놀랐지만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 병실을 나갔다. 

석헌은 병실 문을 닫고 정수기를 찾아가는 파랑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저 언니…… 순수하네요.”


여리의 말에 석헌은 홱 하니 고개를 돌렸다.


 “저 언니는 순수하고 깨끗해요. 오빠는 용감하고요. 저를 시설이 아닌 당신들과 살게 해주세요.”


여리를 바라보는 석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늦여름의 저녁노을을 받으며 병원 침대에 앉아 있는 

작은 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말했던 것처럼 깨어났을 때는 최악이었어요. 머리는 아프고 토악질이 나기도 했죠. 기분도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지더라고요. 모든 것들이 점점 명확해지고,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희 부모님은 저를 낳고 일가친척과 연락을 모조리 끊었어요. 그들이 저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을 했거든요. 

끊임없이, 무책임하게. 심지어 제가 그 자리에 있을 때도. 어렸을 때 죽어야 한다, 그 애가 죽을 때까지 

너희는 자유롭지 못하다, 차라리 시설에 보내라. 뭐 이런 말들. 그때는 몰랐어요. 말은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거든요. 부모님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들이 아닌 저를 선택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위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했어요. 그래서 고심 끝에 이런 시골로 이사를 온 거에요. 지금까지 내 말…… 이해했어요?”


석헌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이 오기 전에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앞으로 누구와 살게 될 것인지. 이 지구상에 나를 맡아 

키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난 당신들과 살고 싶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내가 시설에서 살다가 할아버지와 살기로 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모를 거야.”

 “그러니까 난 아예 시설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애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아니…… 잠깐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너는…….”


문이 열리더니 파랑이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일회용 컵에 물을 담아 들어왔다. 

파랑은 병실을 가로질러 여리에게 다가간 뒤 입에 컵을 대고 물을 삼키게 도와줬다. 

물을 마신 여리가 파랑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니, 고마워요.” 


하얗고 단정한 얼굴의 여리가 웃자 파랑도 함께 미소 지었다.


 “혹시 사고가 나기 전에 뭐 들은 거나, 보거나, 느낀 것 없어?” 


석헌의 말에 여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기억 자체가 선명하지도 않아요. 지금까지 시간이…… 다 불투명하고, 

얼룩져 있는 느낌이에요.”

 “지금은?”

 “좋아요. 언니나 오빠를 보고 있으면 뭔가 보여요. 어떤 사람인지…… 이런 거.” 

 “정말?”

 “네. 아까 제가 말했잖아요. 오늘 처음 봤지만 그런 게 보여요.”


그때 파랑이 석헌에게 휴대폰을 보여줬다. 

시간은 6시 2분 전. 

5시 58분이었다. 


 “어……, 우리는 가봐야겠다.”

 “생각해 볼게요. 사고 전 기억을. 그러니까…… 내일도 올 거죠?” 


여리가 맑고 큰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석헌이 파랑에게 물었다. 파랑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둘은 방금 병원에서 나와 횡성의 버스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둘이나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너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석헌의 말이었다.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석헌이 파랑에게 여리 이야기를 했다. 

파랑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직 물어볼 것도 많고, 시간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응?”


석헌이 다독이자 파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랑을 보내고 석헌은 근처 찜질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뜨거운 탕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싶었다. 

산사태를 쫓아가겠다고 며칠이나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했다. 

몸은 지쳐 있었고, 피곤했다. 




“저는 혼자예요. 언니나 동생도 없죠.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집은 인천이었어요. 그리고 횡성으로 

옮겼죠.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아빠 고향이었거든요. 학교는…… 다니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공부할 정도의 지능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주로 생활했죠. 제 유일한 친구는 솜이였어요. 하얀색 양 인형이에요. 어렸을 때 솜사탕을 좋아했대요. 그래서 저는 폭신폭신 한 것만 보면 솜사탕이라고 

불렀대요.”


석헌은 해를 등지고 창틀에 기대서서 여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리의 짧은 인생은 이렇다 할 것도 없이 금세 끝이 났다. 


 “바깥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어요. 뭐…… 괜찮아요. 솜이와 집에 있는 게 좋았거든요. 어제 오빠가 사고 

나기 전에 뭔가 보거나 느낀 것이 없냐고 물었죠? 오빠랑 언니가 가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봤어요. 우리 집에는 큰 방과 작은 방, 거실 겸 주방 그리고 화장실. 이 정도로 작았어요. 대신 뒷마당이 넓었어요. 뒷마당에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고, 저는 그 나무를 좋아했어요. 날씨가 좋은 날에는 나무 그늘에서 솜이와 소꿉놀이를 하곤 했죠. 하지만 그날은 비가 엄청 많이 내렸던 것 같아요. 산사태가 밤에 일어나서 피해가 컸다고 들었어요. 저는 밤에는 잘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날 밤에는 깼어요. 솜이가 없어졌거든요. 솜이는 애착 인형이라 많이 낡았어요. 하지만 깨어 있을 때는 항상 손에 들고 있었죠. 가끔 세탁이 필요하면 엄마가 밤에 솜이를 빨아서 널어두었다가 제가 일어나면 제 손에 쥐여줬던 것 같아요. 워낙 낡아서 빨아도 티도 안 나지만……

아마 엄마는 그렇게 해줬던 것 같아요. 자다가 일어나서 주변을 더듬었어요. 항상 근처에 있던 솜이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집안을 돌아다녔던 것 같아요. 작은 방에 있는 빨래 건조대에 솜이가 있는 걸 봤어요. 솜이는 축축했어요. 하지만 상관없었어요. 솜이를 찾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대로 작은 방에서 잠든 것 같아요.”


석헌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제가 오빠랑 비슷한가요?”

 “잘 모르겠어.”

 “어제 오빠랑 언니가 가고 나서 계속 생각했어요. 오빠는 왜 앞을 보게 됐고, 언니는 듣게 됐는지. 

언니는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하던데 연습하는 중인가요?”

 “응.”


석헌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의 이야기와 파랑의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여리는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사고를 막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가 모든 사고를 다 예측할 수는 없잖아요. 

오빠나 언니에게 보이거나 들리는 것도 특정사고 뿐이고요. 그리고 실제로 오빠는 아무 사고도 막지 못했어요. 아, 비난하려는 건 아니에요. 사실이 그렇다는 것뿐이죠. 사고를 막기에는 힌트가 너무 적고, 시간도 짧았어요.”


석헌은 여리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너는 지금 몇 살 정도의 지능이야?”

 “글쎄요. 서른쯤?”


고개를 갸웃하며 여리가 대답했다. 


 “나보다 높네?”


석헌의 말에 여리가 눈을 들어 석헌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분이 어땠어요?”

 “언제?”

 “지금까지요. 이런 일이 겪으면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묻는 거예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았을 때는 무척 슬펐지. 나한테 혈육이라고는 할아버지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극복하기에 좀 힘들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조금씩 나아지더라고. 말처럼 나아지는 정도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하긴 어렵고. 그리고 파랑이를 알았을 때는 솔직히 반반이었어. 나만 이런 걸 보는 게 아니길 바랐지. 누군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미안한 마음도 있었어. 내가 자초한 일도 아닌데 말이야. 파랑이는 청력을 얻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너는 어때? 지능을 받았잖아.”

 “난 오빠나 언니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대신 나에게 지능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죄책감은 없지만 그래도 슬프긴 해요.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내 모습을 보면 과연 좋아하셨을까에 대해 의문이기도 해요. 어쨌거나 지금 내 모습도 또래 열 살 아이들과는 다를 테니까요.”

 “아무 표현도 없어서 슬퍼하지 않는 줄 알았어. 말은 안 했지만, 이상하게 생각했지.”


석헌의 말에 여리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운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어요. 차라리 앞으로 나아가는 게 낫다고 봐요.”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다시 말을 꺼낸 것은 여리였다.


 “오빠 말처럼 보거나 느낀 것은 아니지만 잠에서 깨 솜이를 찾아 작은 방으로 들어간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무언가 이끌려서 간 것은 아닐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우리가 겪은 일 중에 뭐라도 확실한 게 있을까? ……그 이야기를 마저 해줄래? 

어제 네가 말했던 것 말이야. 나랑 파랑이가 어떤 사람인지 보인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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