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몰라.
외진 시골길을 달리며 구급대원이 파랑과 석헌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했다.
그는 가능하면 작은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지만, 작은 차 안에서 석헌과 파랑은 통화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방금 통화했는데, 그 아이한테 지적 장애가 있었대요. 네. 읍사무소에서는 그렇게……
네, 그래서 학교에는 부모가 안 보낸 모양이더라고요. 선배는 언제 들어와요?”
석헌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랑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반대쪽 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신은 모두 통화내용에 집중해 있었다.
아이에게 지적 장애가 있었다고?
차는 병원으로 들어섰다. 석헌과 파랑은 구급대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차에서 내렸다.
석헌은 병원으로 들어서면서 파랑에게 휴대폰을 보여줬다.
횡성의 산사태와 유일한 생존자에 대해 검색한 내용이지만 실제로 이렇다 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병원 응급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태풍이 강원도를 휩쓸고 지나간 만큼 아픈 사람과 다친 사람이 곳곳에서 넘쳐났다.
석헌은 여리를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파랑은 내키지 않았다.
그 아이는 고작 열 살.
지적 장애가 있어 학교도 다니지 않았던 아이가 당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불과 1년 전, 파랑 자신도 사고를 당해 이모를 잃지 않았나.
그때 나는 어땠는가를 돌이켜보자 지금은 여리를 만날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아이를 만나서 뭘 어쩌려고?
“물어봐야지. 사고 전에 뭘 보거나, 듣거나, 느낀 것은 없는지.”
석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파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아니에요. 그 아이는 이제 열 살이에요. 게다가 오늘 부모님도 잃었어요.
파랑의 휴대폰을 본 석헌이 파랑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나도 알아. 나도 겪었잖아. 그런데…… 그래, 네가 말한 것처럼 오늘 부모를 잃었어. 너는……
너를 키워줄 이모가 있었잖아. 나는 없었어, 아무도. 그래서 시설로 들어갔어. 이 아이도 어떻게 될지 몰라.
맡아줄 친척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없으면 시설로 들어갈 거야. 그럼 어디로 갔는지 찾아내기도,
만나기도 더 어려워. 게다가 아직 어리잖아. 우리는 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어.”
석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어린아이가 과연 말 할 수 있을까?
나이가 더 많은 석헌도, 파랑도 가족을 잃고 움츠러들지 않았나? 세상에서 멀어지려 애쓰지 않았나?
게다가 아이에게 지적 장애가 있다면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파랑의 표정을 본 석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하지만 기회가 없어. 지금뿐이야.”
남여리
그 아이는 병원 침대에 혼자 앉아 있었다.
파랑이 미닫이문을 열고 빠끔히 얼굴을 들이밀자 소리를 듣고 문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온다.
초승달 같은 눈썹, 크고 맑은 눈, 짧고 곧은 콧대와 얇은 입술.
아이는 단아한 인상을 풍겼다.
“들어오세요.”
아이가 파랑을 향해 말했다. 파랑이 주춤거리며 문을 더 열고 발을 내디딜 때 석헌이 도착했다.
파랑과 석헌은 흩어져서 병원의 병동을 돌아다니며 여리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6층 병동 1인실에서 남*리(9세)를 찾아낼 수 있었다.
파랑은 석헌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여리를 찾았다고.
석헌을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혹시 아이가 잠들어 있지 않을까 싶어 문을 살짝 열어보았는데 여리가 그 소리를 듣고 파랑과 마주친 것이다.
“……잠깐 들어가도 괜찮아?”
석헌이 말했다. 여리는 석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볼 일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니에요?”
여리의 목소리를 들은 석헌은 주춤했다.
아이는 전혀 장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았다.
“응, 맞아.”
석헌은 파랑의 손을 잡고 병실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등 뒤로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병실에는 저녁노을이 들어오고 있었다.
붉은 노을.
노을빛을 받아 길게 늘어진 그림자 위로 혼자 앉아 있는 여리가 쓸쓸해 보인다고 파랑은 생각했다.
아이는 신기하리만큼 차분해 보였다.
“지적 장애가 있다고 들었는데…….”
석헌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침대에 앉아 있는 아홉 살 아이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여리는 어깨를 으쓱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또박또박 말하려 하지만 아이가 냈음 직한 살짝 짧은 발음이 남아있다.
하지만 여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짜…… 잠에서 깬 것 같아요. 아까도 사고 전의 기억을 물어보시던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잘 안 나요.
기억해내려고 하면 머리도 아픈 것 같고……, 전체적으로 뿌연 이미지에요.”
여리가 오른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산사태로 부모님이…….”
“알아요. 돌아가신 거. 아까 들었어요.”
“정말 안 됐다. 유감이야.”
여리는 맑은 눈으로 석헌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석헌의 말이 진실인지를 가려내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저한테 지적 장애가 있는 걸 알고 도시에서 이런 시골로 내려오셨어요. 저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바깥출입도 거의 하지 못했죠. 시설에 맡기지 않고 직접 돌봐주셨지만, 저를…… 창피하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이런 얘기 하려고 오신 거예요?”
“아니, 어…… 일단 나는 함석헌이라고 하고, 이 아이는 서파랑이야. 나는 의령에서 살고 파랑이는 서울에서 살아. 그리고 너는 횡성에 있고.”
석헌의 말에 여리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횡성에서 살아요. 그전에는 인천에 있었고요.”
“아, 그래?”
“조금 있으면 면회 시간이 끝나요. 6시까지라고 들었거든요.”
“아, 미안. 나는 사실…… 몇 년 전까지 앞을 보지 못했어. 부모도 없이 시설에서 살았지. 그 후에 할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오셔서…… 과정이 복잡하긴 했지만 결국 할아버지랑 의령에서 살았어.”
“잠깐만요. 앞을 보지 못했다고요?”
여리가 당황한 채 석헌에게 물었다. 석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이번에는 석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응. 지금은 아주 잘 보여. 나도 신기할 정도로. 근데 나 말고 이런 사람이 또 있어. 여기 파랑이.”
여리가 석헌에게 머물러 있던 시선을 파랑에게 옮겼다.
마치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라고 묻는 것 같았지만 파랑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 파랑을 대신해 석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파랑이는 청각장애가 있었어. 소리를 듣지 못했지. 작년 가을에 일어난 장애인지원센터 가스 폭발 사고…… 혹시 들어 본 적 있어?”
여리는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저었다.
“파랑이는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야. 나는 그전에 있었던 의령 버스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이고.”
아이의 눈이 더 커졌다. 석헌의 말을 이해하는 모양이다.
“그게 정말이에요? 둘 다 유일한 생존자라고요?”
“응.”
“…… 그럼 저는요? 저도 이번 사고에서 살아남았잖아요. 저 말고 생존자가 또 있어요?”
여리의 말에 석헌과 파랑은 고개를 저었다.
“너도 유일한 생존자야. 그리고 보이는 것처럼 장애가 없어졌고.”
“……왜요?”
“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석헌은 가만히 여리를 내려다보았다. 설명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