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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Nov 08.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예견

파랑은 거의 뛰다시피 하며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는 숨이 턱에 차 있었다. 

벌컥 문 열리는 소리에 라면을 끓이던 여리가 화들짝 놀라며 현관에 서 있는 파랑을 보았다. 


 “언니! 왜 왔어?”


파랑이 숨을 헐떡이며 여리를 보았다. 순간 눈동자를 굴리자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놓은 라면 냄비에 

눈길이 멎었다. 여리가 눈치를 보며 급하게 말했다.


 “아니……, 언니가 밥 먹으라고 했는데 오늘 진짜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

 “여리 너, 5학년 1반.”

 “어?”


파랑이 숨을 헐떡이며 다시 말했다.


 “5학년 1반이라고.”

 “전화로 알려줘도 되잖아. 그 얘기하려고 점심시간에 이렇게 급하게 뛰어온 거야?”


여리가 끓는 물에 라면과 수프를 넣으며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파랑은 현관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뭐해 언니, 들어와. 같이 라면 먹자.”


여리가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여리야, 소리가 들렸어.”

 “응? 무슨 소리?”


냄비에 담긴 라면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라면수프 냄새가 집 안에 퍼졌다.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사고로 이모를 잃고 집에 숨어들었을 때. 

항상 시리얼만 먹다가 아주 오랜만에 컵라면을 먹으며 처음으로 석헌의 편지를 읽었을 때가. 

파랑은 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사고……. 그 소리가 들렸어.”     

 “……확실해?”


여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렇게 보였다. 적어도 파랑은 그렇게 느꼈다. 


 “응.”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모르겠어.”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니, 아니. 아니었으면 좋겠어.”

 “언니는 이미 들어봤잖아. 언니 느낌으로는 어떤데?”


현관에서 마주보고 서 있는 파랑과 여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보골보골 라면 끓는 소리만 들렸다. 

파랑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축축해져 있었다.


 “맞아.”   




  

 “아니, 나는 아직 없어. 소리는 언제 들은 거야?”

 “언니가 오전에 들었대. 점심시간에 밥도 안 먹고 집까지 뛰어왔더라고.”

 “파랑이는 지금 어디 있어?”

 “다시 보냈어. 빵집으로.”


여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석헌은 놀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이 작은 아이의 일 처리 능력은 

성인이 된 석헌이나 파랑보다 나았다.


 “파랑이가 순순히 갔어?”

 “아니! 안절부절못했지. 그래서 오빠랑 통화 해 볼 테니 일단 가서 돈이라도 벌어오라고 했어. 

지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파랑이가 들은 소리는 뭐야?”

 “내가 들은 것을 다른 사람한테 설명할 때 100%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지? 감안해서 들어.”

 “그래.”

 “언니가 들은 건…… 많은 사람의 목소리. 웅성웅성하는 목소리였는데 낮게 음악 소리도 흘러나왔대. 소리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나 봐. 그러니까…… 공포에 질렸거나 그런 분위기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밝은 분위기였대.”

 “사고 나기 전의 소리인가 본데?”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사고가 난 후의 소리라면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거야. 아니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든지.”

 “응. 내가 그랬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여리에게 석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놀이동산? 이런 느낌이 들어서 말했더니 언니도 비슷한 것 같대.”

 “아직 추운데…… 놀이동산?”

 “방학이잖아, 오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많이들 가지 않을까?”

 “그래?”

 “응. 작년 같은 반 아이들도 꽤 가더라고.”


여리의 말에 석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같은 반 아이들이 아니고, 친구들. 친구들이라고 해야지.”

 “응? 뭐…… 필요할 때는 그렇게 부르기도 해.”

 “반 배정은 잘 됐어?”

 “아니.”

 “왜? 친한 친구랑 떨어졌어?”

 “아니. 친구가 문제가 아니야. 친구는 어디서든 만들 수 있어.”

 “그럼? 뭐가 문제야?”

 “하…….”


여리가 나이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이어 말했다.


 “작년 우리 반 담임. 나랑 정말 잘 통했는데. 얼굴도 잘생겼고. 약간 아이돌처럼 생겼거든. 

담임선생님한테는 무지갯빛이 나! 그런데 그 선생님이 5학년 5반 맡았대. 난 망했어.”     





주말을 맞아 석헌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왔다. 농부인 석헌은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없지만, 파랑과 여리의 일정에 맞춰 올라왔다. 여리가 의령에서 사 온 하얀 망개떡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비스토 아직도 타고 다니는 거야? 굴러가?”

 “애석하게도 아직 굴러가.”


석헌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야. 대단하네. 명줄 길다.”

 “열두 살짜리가 하는 말치고는 너무 할머니 같은 말 아니야? 나 지금 의령에서 동네 할머니랑 얘기하는 줄 

알았다.”

 “뜻만 통하면 되지!”


여리가 박스에서 망개잎에 싸인 떡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오빠는 어제 뭘 봤어?”


파랑이 냉장고에서 콜라와 주스를 꺼내며 석헌을 향해 물었다. 


 “사람들. 엄청 많은 사람들. 바글바글하다고 할 정도였어.”

 “여름도 아니고 아직 겨울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갈 곳이 어디 있지? 실내였어?”


여리가 석헌의 콜라를 낚아채며 물었다.


 “아니, 실외. 놀이동산 느낌이 나긴 했어. 사람들이 북적이고 특이한 가로등도 있었으니까. 가로등이 유럽에서 쓰는 가로등 같았어. 짙은 갈색에 뭐랄까, 작은 유리창 안에 전등이 있어서 불 들어오는 거 있잖아.”

 “우리나라 맞는 거야?”

 “응. 맞아.”

 “좀 자세히 말해 봐, 오빠.”


여리가 콜라를 마시더니 또 떡을 집어 들었다. 석헌은 그 모습을 보고 손을 들어 여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젯밤에 저녁을 먹고 잠깐 뉴스를 보고 있었어. 파랑이가 말한 사고가 혹시 뉴스에 나올까 해서. 

그런데 별다른 내용은 없더라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해서 잠자리에 누웠지. 그때 이미지가 잠깐 스치듯이 보였어.”


여리와 파랑은 석헌이 말하길 기다렸다. 


 “잠깐 보였던 이미지라서 다시 기억해내려고 눈을 감고 집중했어.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 그리고 아까 말한 가로등이 서 있었는데 위에는 양쪽으로 작은 유리창이 있고 그 안에 전등이 들어있었어. 그리고 가로등에 파란색 뭔가가 매달려서 펄럭이고 있었어.”

 “그게 뭔데?”

 “잘 모르겠어. 영어가 인쇄되어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놀이동산은 아닌 것 같아. 밀리는 것처럼 물결 지어 가는 사람들 뒤로 놀이기구는 전혀 없었어. 대신 가게가 많았어.”

 “가게?”

 “응. 그런데 그 가게들도 간판이 다 영어라서 못 읽겠더라고. 난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스펠링 하나라도 기억나는 거 없어?” 

 “응. 미안해. 그런데 로고라고 하나? 상표? 그런 게 보였어.”

 “뭔데?”

 “이런 거”


석헌이 허공에 대고 검지로 무엇인가를 쓱 그렸다. 


 “뭐야 그게?”


여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이키”

 “응?”


석헌과 여리가 동시에 파랑을 보며 물었다. 


 “나이키 로고잖아.”

 “언니, 이 허접한 동작을 보고 그게 나이키 로고라는 걸 어떻게 알아?”


여리가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파랑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중얼거리듯 파랑이 말했다.


 “사람이 많고, 나이키 매장이 있는 곳. 백화점은 대부분 실내잖아. 긴가민가했는데 나도 패밀리세일 어쩌고를 들은 것 같아. 지금 든 생각인데 혹시 아울렛이 아닐까? 우리나라에 아울렛이 얼마나 있지? 엄청 많지 않아?”

 “아울렛?”

 “실내가 아닌 실외에 있는 아울렛만 따져 봐도 만만치 않을걸?”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나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


여리가 망개떡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디인지 알잖아. 가까운 곳부터 돌아보면 이미지와 맞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울렛이라고 확신해? 오빠,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 둘러보기라도 하자. 그……아울렛이라는 곳을 말이야. 장소를 알아놓으면 그래도 쉽지 않을까?”

 “사고에 쉽고 말고가 어디 있어. 오빠랑 언니가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해보면 사고는 아마…… 낮에 일어나나? 그것도 사람이 많을 때?”

 “……아울렛에 가 본 적 있어?”


파랑이 묻자 석헌과 여리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모랑 가 본 적이 있어. 주말에. 사람이 엄청 많았어. 오빠가 본 이미지나 내가 들은 소리로 보면 주말 낮인 것 같아. 다 돌아보긴 어렵고 오빠 말대로 가까운 곳에 있는 아울렛 몇 곳을 돌아보고 오자. 나중에 다른 것들이 보이거나 들려도 장소를 알고 있다면 대처하기 나을 거야.”

 “지하철이랑 버스 타고 거길 언제 다 돌아봐.”


여리가 투덜댔다. 석헌이 여리를 빠끔히 바라 보며 말했다.


 “괜찮아. 비스토가 있잖아.”

 “……더 가기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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