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빛
천안에 들어서자 어느새 4시가 넘었다. 주말이라 차가 밀린 탓이다.
석헌은 쉬지 않고 운전해 새로 생겼다던 천안의 아울렛에 도착했다. 여리는 어느새 뒷좌석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주차를 하고 파랑은 차에서 내려 여리를 깨웠다.
여리가 눈을 비비며 부스스 깨어났다.
“다 왔어?”
“응. 조금만 걸어가면 돼.”
여리가 차에서 내리자 뒷좌석 시트에 호두과자 두 알이 떨어져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다 먹기도 전에
잠이 든 모양이다. 파랑이 시트에 떨어진 호두과자를 집어 종이봉투에 넣었다.
“언니.”
“응?”
“……여기야.”
“뭐?”
“여기라고.”
파랑이 뒷좌석으로 숙였던 몸을 빼고 허리를 펴면서 여리를 보았다. 여리는 어딘가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 사고가 났어?”
“아니, 아직. 그런데 얼마 안 남았어.”
“얼마나?”
석헌이 급하게 물었다. 여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시간까지는 몰라. 그런데 여기는 확실해. 바로 저곳.”
여리는 아울렛 건물이 서 있는 한 곳을 가리켰다.
다행히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 유럽풍의 연한 베이지색 벽과 갈색 지붕, 2층 바깥쪽에는 나이키 로고와
다른 브랜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기가 확실해?”
석헌이 묻자 여리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뒤돌아 석헌과 파랑을 보는 여리의 눈은 슬퍼 보였다.
“응.”
“어떻게 알아, 여리야?”
파랑이 풀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리의 팔을 잡고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여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색깔이…… 색깔이 보여.”
“색깔이 어떻게 보이는데?”
파랑은 마음이 아팠다. 아직 작고 어린 이 아이에게 도대체 무엇이 보이기에 항상 당차고 야무진 여리가
이렇게 슬퍼할까. 석헌이 파랑의 팔을 잡았다.
“가면서 얘기해. 지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석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석헌과 파랑, 여리는 가장 꼭대기 주차장에 주차했다. 아래층은 만차였다. 이들은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석헌은 연신 손가락을 까닥이며 움직였고, 파랑은 여리가 가엽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많았다.
주차장 아래로는 들어가고 나가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4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엘리베이터는 3층으로 2층으로 내려갔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마침내 1층에 도착해 모든 사람이 내리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들이 채우자 파랑이 여리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여리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는지 파랑의 손에 쉽게 끌려왔다.
“뭘 봤어?”
파랑이 속삭여 물었다. 여리가 파랑을 올려다봤다. 맑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색깔.”
“어떤 색깔?”
여리가 고개를 돌려 자신이 가리켰던 건물을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1층으로 내려온 지금 그 건물은
다른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색이 건물 일부를 휘감고 있었어. 나는…… 나는 그곳으로 못 갈 것 같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여리가 말했다.
“왜 그래? 그렇다고 여기에 너를 혼자 두고 갈 수도 없어.”
“그 건물이 어디인지 아니까 너는 가까이 가지 마. 그래도 근처까지는 가야 해.”
석헌이 파랑을 저지하며 말했다. 여리는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무서워했지만, 석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을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빨리. 얼마 안 남았어.”
아울렛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분수가 있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각종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개울을 따라 설치된 가로등은 석헌이 표현한 그대로였다.
고딕양식의 짙은 구리색 가로등에는 파란색 띠가 걸려있었는데 모두 <GRAND OPEN>이라는 글자가 쓰인
채로 바람에 우아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걷기도 하고, 쇼윈도를 구경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금요일에 오픈하고 처음 맞는 주말이라 사람은 말도 못 할 정도로 많았다.
“저기야.”
여리가 더 이상 발을 떼지 않고 손을 들어 한 건물을 가리켰다.
“아, 죄송합니다.”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이 갑자기 멈춰 선 여리와 살짝 부딪히자 사과하고 사라졌다.
석헌이 여리의 팔을 잡고 인파가 다소 적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 뭔지 보여? 화재야?”
석헌이 묻자 여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입은 굳게 다물어 있었다.
“그럼? 뭐야?”
“땅.”
“땅?”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런데 그 색은…… 땅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어.”
석헌과 파랑의 눈이 마주쳤다.
“혹시 지진이야?”
“모르겠어. ……그런 것 같아.”
머리를 흔들며 여리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관리실에 가서 대피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석헌이 파랑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파랑도 뭘 어째야 할지 몰랐다.
“일단 내가 관리실로 가서 말해 볼게. 넌 여리 데리고 피해 있어.”
아니야. 나도 오빠랑 가든 혼자 가든 사람들을 대피시킬래.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파랑이 입을 열자마자 여리가 파랑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니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리가 눈에 보였다.
“언니…….”
여리가 더 바싹 다가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파랑의 옷자락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가자. 언니…….”
석헌은 파랑의 팔을 툭툭 치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인파에 쉽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멀어지는 석헌의 모습을 보고 파랑은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여리의 손을 떼어냈다.
“나도 건물로 가서 사람들을 대피시킬게. 네 말대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면 서둘러야 해.”
파랑의 말을 들은 여리의 눈에서 눈물이 맺혔다.
“언니……, 나는 무서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으로 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여리의 말이 파랑의 가슴을 후벼 팠다. 여리가 말하는 것은 산사태가 났을 당시 무너진 집에 혼자
살아남았던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파랑이 힘들게 침을 삼키고 여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사람들을 살려야 하잖아. 여리야, 너는 건물 밖으로 피해 있어. 나중에…… 사람들을 다 살리고 나면
그때 다시 보자.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남아 있으면 언니가 꼭 찾으러 갈게.”
덜덜 떨고 있는 여리를 안아주면서 파랑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 파랑도 무서웠다. 두려웠다.
하지만 여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여리를 달래주고 싶었다.
여리의 떨림이 점차 멈추기 시작했다.
파랑은 여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일어섰다.
“저기 나가는 곳 보이지? 저쪽으로 나가서 사고 현장이랑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 나나 오빠가 반드시
너를 찾으러 갈게. 죽음의 색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있어.”
파랑이 여리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여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가.”
파랑은 여리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여리가 말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최대한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다.
다들 나가야 한다고. 모두 대피하라고.
그런데 뒤돌던 여리가 움직이지 않고 멈췄다.
무섭다던 아이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멈춰 섰다.
여리의 뒤에 서 있던 파랑은 왜 빨리 피하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여리의 머리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여리야.”
파랑이 여리를 불렀지만, 대답도 없이 정신이 팔린 것처럼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리의 시선을 따라가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리 지어 입구로 들어오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
“저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