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
비명.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고음의 비명이 도화선이 되었다.
사람들이 출구를 찾아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쪽은 안 돼요! 이쪽으로!”
중앙에 있는 에스컬레이터에서 파랑이 오른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 파랑은 왼쪽을 가리켰다. 건물 오른쪽은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왼쪽에 출구가 있었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쪽은 안 된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소음에 파랑의 목소리는 묻혔다.
건물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가까운 출입구를 보고 그쪽으로 몰렸지만, 건물이 더 기울어졌다.
마침내 우지끈 소리를 내며 2층 천장 일부가 끊어졌다. 뽀얀 흙먼지가 일어나더니 매끈한 천장이 갈라지고
철근이 드러났다.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3층에서는 사람들이 고함이 들렸다.
이건 지진이 아니다.
지진과 같은 흔들림이 아니라 건물 일부가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건물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이 기울어진 쪽으로 미끄러졌다.
“도와줘요!”
건물 왼쪽에 있던 사람들과 운 좋게 중앙에 있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로 몰리면서 사람들이 치이고
밟히기 시작했다. 3층에 있던 사람들도 빠른 속도로 내려왔지만 2층에 있던 사람들과 섞이면서
더 이상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벽뿐 아니라 바닥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30센티 정도 떨어진 바닥이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파랑은 사람들을 따라 대피하는 대신 건물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대피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한 명이라도 더 이쪽으로.
여자아이가 보였다. 여리보다 작은 아이.
바닥은 점점 기울면서 균열이 심해졌다. 여자아이는 울면서 부모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넘어오고 싶어 했지만, 바닥이 갈라져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파랑은 자신의 뒤에 서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남자의 옷을 잡았다.
남자가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파랑이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내가 넘어가서 아이를 넘길 테니까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요.”
남자의 눈에 한순간 망설임이 스쳤지만, 파랑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아이를 보더니 주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랑은 도약해 무너져 내리는 건물로 뛰어넘어갔다. 기울기가 심해 착지하는데 기우뚱했다.
손으로 바닥을 짚고 곧바로 일어나 아이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넣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다리와 발에 힘을 주고 아이를 들어 올린 후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는 팔을 쭉 뻗어 아이를 건네받고 품에 안은 채 인파에 섞여 아래로 내려갔다.
파랑이 아이를 건넨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건물 중앙으로 이동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파랑은 뒤에 있던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올라와요. 저쪽으로 뛰어넘으면 사람들이 받아 줄 거예요!”
아주머니가 엉덩이를 뒤로 빼고 반대쪽으로 뛰어갔고 파랑은 체중을 실어 아주머니의 엉덩이를 밀었다.
바닥이 쿵 소리를 내며 더 내려앉더니 중앙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와 동시에 2층과 3층을 지지하던 벽이 주저앉기 시작하더니 천장 일부가 눈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파랑은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무너지는 벽 앞에도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채 서 있었다.
달리던 파랑은 그 아이를 보았다. 여리가 가리킨 유일한 생존자.
3층 바닥과 함께 2층으로 떨어진 아이가 정신없이 울고 있었다.
다행히 외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이 역시 부모 없이 혼자였다.
아이를 안고 있던 아빠는 무너진 바닥 아래로 떨어진 모양이다. 파랑은 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언제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아이에게 닿기 직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2층 벽, 콘크리트 덩어리가 파랑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석헌은 경비와 함께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지하에는 건물의 균열이 이미 시작되었고, 파이프가 터져 금이 간 벽에서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1층에 도착해 출입문으로 달려갔지만, 근처에 닿기도 전에 인파에 밀려 이리저리 휩쓸렸다.
자동문으로 되어 있는 1층 출입구는 전기가 끊겨 3분의 1 정도만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그 틈으로 도망가기 위해 몰려들었다. 건물은 지상에서 15센터 정도 내려앉아 있었다.
좁아진 입구. 석헌과 경비는 유리문을 깨기 위해 출입문을 향해 달려갔지만, 이번에는 몰려든 인파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다. 작은 아이들과 힘없는 노인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고 도망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출입문으로 간다고 해도 몰려든 인파로 인해 문을 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소리를 치며 울부짖었지만, 오히려 느리게 움직였다.
2층으로 향하던 에스컬레이터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1층 어디에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창문이 없었다.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아이와 가족을 찾는 사람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람들.
한 번 더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이 바닥으로 더 깊이 내려앉았고 오른쪽은 급경사가 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기울어진 곳에는 물이 차기 시작했다. 아마도 1층의 수도관도 터진 모양이다.
발아래로 찰랑거리는 물은 도화선이 되었다. 사람들이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석헌이 인파에 휩쓸려 간신히 출입문 가까이 도착했다. 오른쪽에는 유리로 된 출입문이 석헌을 짓누르고
왼쪽에는 인파가 석헌을 밀어붙였다. 바로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문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쉽지 않았다.
문밖으로 나간 사람들도 내려앉은 건물로 인해 기어오르듯이 밖으로 나가야 해서 속도는 더욱 나지 않았다. 그때 압력을 이기지 못한 유리문이 휘어지는가 싶더니 큰 소리를 내며 터지듯이 깨졌다.
석헌의 눈앞에서 유리 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파랑과 헤어진 여리는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여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산사태로 지능을 받은 여리는 지적 장애를 갖고 있었던 시절의 기억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항상 뿌옇고 안개에 싸인 기억들. 여리에게 추억이란 모두 파랑언니와 석헌오빠와 함께 한 시간뿐이다.
소중한 시간들. 잊을 수 없는 경험들.
여리는 그 아이를 알아보았다.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남을 유일한 생존자.
D관이 세워진 땅에서 내뿜던 죽음의 색. 그리고 그곳으로 향하던 사람들을 에워싼 어두운색들.
그들은 죽을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도 있겠지만 절반 넘는 사람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만은 다른 색을 내뿜고 있었다. 어두운색들이 넘실거리는 사람들 틈에 오직 그 아이만 은색에 가까운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남자아이가 뿜어내는 찬란한 빛에 홀린
것처럼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파랑이 여리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맞히자 시야가 차단된다.
“저 아이가 유일한 생존자야.”
“아니, 이번에는 우리가 막을 거야. 모두 살아남을 거야. 아무도 죽지 않아.”
여리와 눈을 맞추는 파랑의 주위에도 죽음이 빛이 머물러 있다. 어둡고 음습한 죽음의 색.
“응, 언니 말이 맞아. 이번에는 살아남을 거야.”
색을 쫓아내려 눈을 깜박이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소중한 파랑언니에게도 같은 색이 머물러 있다. 여리는 손을 들어 파랑의 손을 잡았다. 이 손을 잡는 것도 마지막이겠지.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언니를 기다릴게. 내가 달아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뛰어갈게. 오빠랑 꼭
데리러 와 줘.”
착하고 순수한 파랑 언니. 그 파랑의 눈동자에 비친 여리의 모습에서도 죽음의 색을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의 색은 파랑 뿐 아니라 여리도 휘감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죽는구나.
석헌 오빠라도 살아남길 바랄 수밖에.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고 말한다.
“꼭 데리러 와.”
“그래. 꼭 갈게.”
여리는 파랑과 헤어져 출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인파 사이로 섞여들자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파랑이 있는 곳을 돌아본다.
파랑도 여리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헤어진 그 자리에서 방금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