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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뢰 Nov 29. 2024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prologue

여리는 3층에서 발견됐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다채로운 색을 보던 맑은 눈은 감겨 있었고, 파랑을 

따라다니며 쫑알대던 작은 입술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밟혔는지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사고가 날 것을 알고 있었던 여리가 왜 다시 건물로 돌아왔을까? 3층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오열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여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여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파랑에게 언니 행세를 하며 잔소리하던 여리가, 지는 노을 속에서 파랑과 살게 해달라고 석헌을 설득하던 

여리가 보였다. 석헌과 파랑은 죽을 때까지 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부실 공사.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후에야 밝혀지는 원인들. D관 아래에는 애초에 지하 주차장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공사를 할수록 지반이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지하 주차장은 안 돼. 땅을 메우고 위에 

건물을 올려야 해. 하지만 그러자면 시간과 돈이 들었다. 차선책으로 주차장을 옆에 세우고 건물을 올리자. 

그럴듯해 보였다. 지반이 약한 땅을 자꾸 파 내려가는 것이 아니니까. 

이미 파 놓은 지하는 대충 메우고 아울렛 운영에 필요한 잡다한 시설을 이곳에 넣어두자. 

다행히 가오픈 날에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오픈인 금요일을 앞두고 며칠 동안 비가 내렸다. 

봄비네. 장사가 잘되려나 봐. 주말에는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개학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사람들의 바람대로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지반은 더욱 약해져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시공사는 피해 금액을 줄이기에만 급급했다. 

유가족은 유가족대로, 생존자는 생존자대로 끝나지 않는 지옥을 겪고 있을 뿐이다.      


파랑은 준우를 찾고 싶었다. 여리가 가리킨 그 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다. 

끝까지 품에서 지켰던 아이. 파랑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찬란한 빛을 품고 있는 아이. 

아이는 이모에게 갔다. 이모에게 안겨 떠나는 준우를 보자 파랑은 자신의 이모가 생각났다.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숙였다. 





prologue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령의 겨울바람은 서울보다 향긋했다. 

차가운 아스팔트나 회색 건물 사이로 부는 바람이 아니라 계절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었다. 비록 겨울이긴 

했지만. 


 “오빠!”


파랑의 목소리가 작은 마당에 메아리쳤다. 석헌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마루에 앉아 볕을 쬐던 고양이 

여리가 엉덩이를 들고 일어선다. 고양이는 우아하게 땅으로 착지하더니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석헌은 왼쪽 눈으로 파랑의 실루엣을 확인했다. 사고로 오른쪽 시력을 잃고, 왼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졌지만 그나마 요즘은 이렇게나마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른쪽 눈은 명암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파랑이 석헌의 근처에 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점심 먹었어?”


파랑도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 아스팔트 파편에 맞은 오른쪽 귀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고, 왼쪽 귀는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시력과 청력이 전보다 못했지만, 석헌과 파랑은 좌절하지 않았다. 아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때도 있지 않았나. 그에 비해 지금은 빛을 감지하고 소리를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너 온다고 해서 국수 삶으려고.”


석헌이 웃으며 대답했다. 파랑이 석헌의 손을 잡더니 종이봉투를 건넸다. 


 “오빠 간식으로 먹으라고 빵 좀 구워왔어.”


석헌은 종이봉투에 손을 넣어 빵을 더듬었다. 오는 동안 식었겠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이런 시골에서는 읍내에 나가지 않는 이상 빵을 먹는 일이 자주 없다. 


 “일은 할 만해?”


빵이 든 종이봉투를 마루 한쪽에 세워두면서 석헌이 말했다. 파랑은 1년 전 석헌의 말을 듣고 서울에서 

의령으로 이사를 했다.     

 

 “이모의 흔적도 보이고, 여리의 흔적도 보여서 힘들어.”


이사를 고민하는 이유였다. 석헌은 그런 파랑을 이해했다. 같은 일을 겪었으니까. 


 “그럼 의령으로 와. 읍내랑 시장에는 빵집이 있으니까.”


서울에서 의령은 꽤 멀었지만, 파랑은 의령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의령으로 들어가는 이팝나무 가로수 길도, 따듯한 소바를 파는 의령시장도, 단층의 시골집이 길게 늘어서 

있는 의령 외곽의 한적한 시골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만 살았던 파랑에게 의령은 

망개떡만큼이나 달콤한 곳이었다.      


오늘처럼 시간이 날 때면 버스를 타고 석헌이 사는 집까지 종종 놀러 오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한가롭게 의령의 친수공원을 거닐기도 했다. 한여름 친수공원에 핀 하얀 개망초 물결은 파랑이 가장 좋아하는 장관이기도 하다. 

새로운 환경은 파랑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줬다. 여전했다. 상처받고, 치유하고. 또 상처받고, 치유하고.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나간다.  

    

그는 여전하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는 파랑을 찾아내 밝은 빛으로 이끌어 낸다.      

그와 처음 얼굴을 마주보고 선 날. 빌라 1층에서도 그랬지. 그는 밝은 햇빛 아래 있었고, 나는 그늘 안에 서 

있었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망설이고 있었지. 내 목소리를 싫어해 입을 다물었던 나에게 

그 다운 제안을 했지. 말을 해야 한다고.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 연습을 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고 이모가 남긴 옷을 입고 이모가 사용하던 이불 안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의령. 그는 또다시 나를 빛으로 이끌고 있다. 무엇을 망설이겠나. 그는 언제나 나를 빛으로 인도하는데.      

파랑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응. 다들 잘 해주셔서. 오빠는 어때? 이제 시간도 좀 나?”

 “나 같은 초보 농사꾼은 농한기에도 바쁘지.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파랑이 작은 툇마루에 앉았다. 고양이 여리가 앉아 있던 볕이 잘 드는 곳에. 그러자 어느새 사라졌던 고양이 여리가 파랑에게 다가와 고롱거리며 다리에 얼굴을 부벼댔다. 

다시 바람이 분다. 초겨울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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