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딱, 메트로놈

아홉 번째 조각

by 진언

2004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의 J는 화장대에 앉아 자신을 바라봤다. 옅은 미소를 지어봤지만 어색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OOO입니다.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말만 수십 번 되풀이하고 있었다.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얹힌 듯 답답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잘할 수 있을 거야.'


'덜컹-덜컹-덜컹' 지하철이 리듬을 타며 움직이고 있었다. J의 시선은 발제문에 머물렀지만, 마음은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의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심장의 리듬도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몸은 항진 상태로 휩쓸려갔다. '오늘도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시겠지?' 그 표정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J는 대학원생이었다. 몇 개월 전 지도 교수를 결정했고, 이제 막 연구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가 교수를 선택한 기준은 단 하나였다. 학부 때부터 익히 들어온 유명 학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학부를 마치고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딱히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 번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받고 싶었다. 4년 간 애써 눈 감아 온,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 자존심은 더 뭉개지고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조용히 앉아 교수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교수님이 수업 시작을 알렸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학자였던 그는 존재 자체로 권위를 뿜어냈다. 모두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발제를 앞둔 J는 조용히 심호흡하며 발제 예정인 다른 학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 저 평온한 표정은 뭐지?' 당당한 표정에 그녀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곧 손바닥이 흥건해졌다. 땀을 쓱쓱 문지르고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 이제, J 시작하지." 교수님의 한 마디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안녕하세요. J입니다.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발제가 시작되었다. 극도로 긴장한 J는 빠르게 준비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말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는 속도에 그녀는 당황했다. '하... 망했다!' 그녀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목소리는 갈라진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교수님의 눈빛을 살폈다. 그는 예의 못 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다, 빨리 끝내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는 재빨리 발제를 마무리했다.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침묵을 깨는 교수님의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앞으로 J 발표할 땐 메트로놈을 갖다 놔. 그 속도에 맞춰 말하게 말이야."


여기저기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정작 J는 웃지 못했다. 막 100m 달리기를 끝낸 아이처럼, 거친 호흡과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다른 학생들의 발제가 이어졌다. 교수님의 눈을 마주 보며 천연덕스럽게 발표를 이어가던 그들은 마치 우사인 볼트 같았다.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경기를 마치고 장난스럽게 번개 포즈를 취하던 우사인 볼트. 그들의 여유 있는 포즈에 그녀는 한 번 더 무너졌다.




"나는 네가 그 대학에 만족할 줄은 몰랐다."


학부 생활 내내 J의 머릿속을 맴돌았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녀는 수능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부모의 실망스러운 표정과 마주했다. 하지만 가장 크게 실망했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나 재수를 선택하진 않았다. 다시 긴장의 시간을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시를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특차 전형을 통해 빠르게 입시 과정을 마무리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경쟁의 긴장과 기다림의 순간을 견뎌 낼 용기가 없었다. 이런 자신의 무기력함에 그녀는 또 한 번 크게 실망했다. 자포자기, 그녀의 대학 생활은 무력감으로 얼룩진 채 시작되었다.


그러나 J의 타고난 성실함은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졸업 당시 그녀의 학점은 4.3점을 넘었다. 학문을 향한 열정보단 성실한 습관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선망했던 학교로 석사를 지원했다. 수업 첫날, 강의실 분위기는 여대와 달리 열정적이었다. 다양한 이론과 연결하여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는 기술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홈그라운드에서 더 큰 성장을 기대하는 이들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4년 전 그날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결국 나의 자리는 그곳이었을까?'


일주일 후, 또 다른 발제가 시작되었다. J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황금색 알을 꺼냈다. 포장지를 벗기자 진한 고동색의 청심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럼, 이렇게라도 해봐야지!' 그녀는 약을 조물조물 씹으며 스스로에게 답했다. 그러나 또다시 마주한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의 간절한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또, 또, 또 빨라!!!'




그해 겨울, 발표 불안을 극복하고 싶었던 J는 한 스피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명 넘게 모인 그날, 그녀는 자신의 발표 기술이 전혀 부족하지 않음을 알았다. 오히려 탁월했다. 프로그램 말미, 담당자는 그날의 MVP로 그녀를 선정했다. 기분이 묘했다. 사시나무 떨듯 애처롭게 울리던 목소리는 결국 발표 자체가 아닌, 특정 상황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되찾았다. 박사 과정을 이어가진 않았지만, 졸업 자격을 위한 종합시험도 한 번에 합격했다. 당시 모두가 한 번에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금씩 자신의 열등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J는 공공기관에 취업하게 되었다. 신입사원 시보가 끝나던 날, 회사는 비전 선포식을 개최했고 그 자리에 신입사원의 가족을 초청했다. J의 부모님은 가장 앞줄에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신입사원 PT 경쟁에서 1등을 한 그녀는 그날 수백 명의 선배들 앞에서 발표를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OOO입니다."


딸보다 더 긴장한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말의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장점이기도 했다. 직원들은 그녀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백 명의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게 즐거웠다. 20분은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갔다.


"부족한 저의 발표를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표를 마치고 돌아서던 순간, J의 머릿속에 그날의 메트로놈이 떠올랐다. 똑-딱, 똑-딱, 똑-딱, 그 당시 메트로놈의 진자는 타인의 시선을 동력 삼아 움직였다. 타인의 시선이 거칠수록 진자는 더욱 빠르게 요동쳤다. 그녀의 심장도 함께 고동쳤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메트로놈은 다른 동력을 찾았다. 시보 생활 내내 그녀는 일지를 썼다. 고객의 불편함을 찾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매일 고민했다. 90일간 한 겹씩 쌓인 진심은 그녀에게 열등감과 직면할 용기를 주었다. 무대를 내려온 그녀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기분 좋은 떨림을 느꼈다. 그녀가 진실로 두려웠던 건 타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쯧쯧, 봐봐, 난 안 돼.' 타인의 시선은, 열등감이 불러온 자괴감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었다. 그 자괴감을 한 겹씩 걷어내자, 그녀는 자신의 보물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정성이었다. 자신이 높게 세운 벽을 허물고 진심을 그대로 바라볼 때, 자신만의 메트로놈이 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았다. '똑-딱, 똑-딱.' 2008년 4월, 안정적인 속도로 귓가를 맴돌던 메트로놈 소리는, J의 빛나는 찰나의 조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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