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조각
2017년 4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J는 방금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곧이어 건물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나타났다. 차량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자, 그녀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저 멀리 OO대학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행선지였다. 순간 무표정한 주치의 얼굴이 뇌리 속을 가득 채웠다. 움찔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핸들을 쥔 손가락 사이사이로 번져 나갔다. '유턴할까? 갑자기 일이 생겨 못 간다고 할까?' 주춤하던 찰나, 차량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선명한 초록색은 꾸물대는 J를 나무라는 듯 밝게 빛났다. 그녀는 결국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B2, B1, 1, 2... 엘리베이터 표시등 숫자가 하나씩 올라갔다. J는 멍하니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화면에 3이 등장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제 무표정한 얼굴과 대면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긴 호흡과 함께 어두운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틀자, 정신건강의학과 안내판이 무덤덤하게 그녀를 반겼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접수 카운터를 지나 한 진료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똑' 그녀는 조심스레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네, 들어오세요." 진료실 안 무표정한 얼굴 역시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음... 음... 저..."
"네, 말씀하세요."
"오늘은 정말 생각나는 말이 없어요. 선생님이 먼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왜 생각나는 말이 없을까요?"
"아... 그게..."
J는 지난 1월부터 정신역동치료를 받고 있었다. 2016년 11월 불안 장애 진단을 받고 2개월이 지난 후였다. 주치의는 불안의 근본 원인과 마주할 용기가 있을 때, 정신역동치료를 시작해 보자고 권했다. 이는 치료자가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며 내담자의 무의식을 탐색하는 치료였다. 당시 그녀는 약물 치료 덕분에 발작 증세가 완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불안의 씨앗이 하루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굴레에선 여전히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결국 원인을 찾기로 했고, 정신역동치료가 그녀의 빛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치료는 차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주치의는 J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의 큰 눈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고,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녀는 조금씩 숨이 가빠왔다. 그녀는 침을 삼키며 호흡을 가다듬었고, 그 소리만이 진료실을 채우고 있었다. 주저하는 침묵과 냉담한 침묵의 대치. 주저하는 침묵이 먼저 대치의 끈을 놓았다.
"오늘 여기 오는 게 힘들었어요."
"왜 힘이 들었을까요?"
메아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진 무표정한 침묵.
"선생님, 죄송한데요. 웃어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웃지 않는 게 불편하신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무서워요."
"왜 무서울까요?"
"무표정한 얼굴이 무서워요. 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거든요. 무언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
"잘못하신 것 같아요?"
"네, 부족한 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죠?"
"그냥 다요. 다 부족한 것 같아요."
"그럼,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할 때 J님은 어떻게 하세요?"
"그냥 밝게 웃어요. 만약 그 사람이 저를 보고 웃으면 마음을 놓고요. 아니라면 아예 피해버려요."
그랬다. 그녀는 유독 무표정한 사람 앞에서 긴장했다. 활짝 웃는 사람에겐 마음을 쉽게 열었고, 무표정한 사람에겐 말 한마디 쉽게 건네지 못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미소는 자신의 편과 적을 가려내는 중요한 기준이자 도구였다. 그래서 그녀는 늘 웃었다. 그리고 그만큼 늘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이 제가 아플 때와 안 아플 때의 차이가 크다고 하더라고요. 아플 땐 웃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듣고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그럼 아플 때도 웃으란 말인가,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플 땐 어떤 마음이 들어요?"
"실은... 편해요. 제가 생리통이 심하거든요. 한 달에 한 번은 크게 아픈데, 그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왜 편할까요?"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웃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 듯한 느낌이에요. 그날은, 그냥 저로 있어도 괜찮다는, 웃지 않아도 괜찮다는 승인을 받은 느낌이 들어요."
"그날은 어떻게 지내세요?"
"집에선 늘어지게 잠을 자고요. 회사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애쓰지 않아도,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마음이 편해요. 그래도 이해받는 날이니까요."
"이해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아... 그건..."
자신을 곱씹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J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해받을 필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던 자신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생리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녀는 자주 울었다. 그저 아파서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여겼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엔 다른 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서럽게 울었다. 그녀는 그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날은, 울어도 괜찮은 유일한 날이었다. 한 달간 쌓이고 쌓인 감정을 터트릴 수 있는 유일한 날, J의 댐은 마른 가뭄을 핑계 삼아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수문을 한순간에 열어젖혔다. 갇혀 있던 눈물은 압력을 못 이겨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고, 깊게 묵힌 감정도 함께 터져 나왔다. 그래서 생리통은 두려우면서 동시에 반가운 존재였다. 생리통은 그녀에게 무표정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을 허락했다.
J는 퉁퉁 부은 눈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울음은 멎었지만, 호흡이 진정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몸은 가벼웠다. 자신을 향한 의심과 비난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온 듯했다. 병원을 나온 그녀는 다시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붉은색으로 물든 하늘이 그녀를 포근하게 감쌌다. 갑자기 그녀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무표정 포비아엔 시기심과 억울함도 있지 않았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인정 욕구를 선택한 순간, 나의 자유 욕구는 무의식 깊은 곳으로 떨어졌을 거야. 하지만 꾸역꾸역 올라오며 나를 숨 막히게 했겠지. 이 자유 욕구를 억누르느라,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할 만큼. 그런데 웃지 않는 얼굴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나게 됐으니,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어. 자유로운 그들이 한없이 부러웠겠지.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의식은 심리적 불편감을 공포로 느꼈을지도 몰라. 욕구를 억누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의 무표정 포비아와 마주한 순간, J는 이제야 자신을 향한 여정을 제대로 시작한 듯했다. 그녀가 느끼는 모든 불안과 공포는 결국 그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특히 인정 욕구를 향한 무한한 갈망은 그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결국 그녀가 찾고 있던 답은 그녀 자신 안에 있었다. 마음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2017년 4월 심리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그 찰나의 조각은 J에게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