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운동회

열 번째 이야기

by 진언

2023년 10월의 어느 날,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조카가 J를 불렀다. "고모, 고모, 고모!" 조카는 그녀를 부를 때, 늘 세 번 불렀다. 그러면 그녀 역시 세 번 답하며 달려갔다. "왜, 왜, 왜?"


"고모, 있잖아. 나 이번 토요일에 운동회 하잖아. 그때 나 뭐 하는지 알아?"

"우리 OO 뭐 할까?"

"나, 어린이집에서 달리기 넘버원이잖아. 그래서 이어달리기 주자로 나간다!"

"우와, 정말? 또 1등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또... 모래주머니 던지기도 하고... 또..."


흥분한 조카가 할 말을 생각하며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미소를 머금은 채 종알종알 말하는 모습에서 조카가 운동회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느껴졌다.


"그런데, 고모 올 거야?"

"응, 이번엔 갈게. 휴가 내고 꼭 갈게. 어린이집 마지막 운동회잖아. 그동안 고모가 못 가서 서운했지?"

"아니야. 할아버지도 왔었잖아. 괜찮았어."

"그러면 고모 안 가도 돼?"

"아니야! 오면 더 좋지!"


마지막 씨익 웃는 모습에 J는 또 한 번 설렜다. 조카는 J를 웃게 하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며칠 후, OO초등학교에서 어린이집 가족 운동회가 열렸다. 택시에서 내린 J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선생님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운동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 멀리 파란색 옷을 입은 새언니가 J와 어머니를 반가이 맞았다. 그늘진 곳에 자리 잡은 J는 조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단상 앞 아이들 무리가 보였다. 그녀는 무리에서 단번에 조카를 찾아냈다. 조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간 하원을 도우며 어린이집을 방문했지만, 조카의 사회생활을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궁금하고 설렜다.


아이들 무리는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몇몇 아이들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자유를 찾아 떠도는 한 마리 새 같았다. 조카는 어미 새를 바라보는 아기 새처럼, 잠시도 선생님의 눈빛을 벗어나지 않았다. '듬직하네, 대단한걸!' 평소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며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던 조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풋, 귀엽군. 우리 조카,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건가.’


운동회는 청팀과 홍팀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청팀 이겨라! 청팀 이겨라!" 파란색을 좋아하던 조카는 다행히 청팀에 속했다. 운동장 모래바람은 아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방향을 수시로 바꿨다. 경기 중 한 아이가 그들 좌측 돗자리로 다가왔다. 아이 엄마는 아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아이는 한참을 종알거리다 돌아갔다. 이번엔 우측 돗자리로 한 아이가 찾아왔다. 이 아이 역시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 낸 후 유유히 사라졌다. 자연스레 J의 시선은 무리 속 조카에게 향했다. 조카는 여전히 선생님만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점심시간, J와 어머니, 새언니, 그리고 조카는 둘러앉아 김밥과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고모, 봤어? 나 하는 거 봤어?" "그럼, 우리 OO 너무 민첩하더라. 역시 넘버원이야!" "나 이젠 파도타기랑 이어달리기만 하면 된다!" 작은 얼굴에 뿌듯함이 번졌다. "고모가 엄청 크게 응원해 줄게! 기대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두 아이가 조카를 찾아왔다. 아까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를 만끽하던 새들이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오후 운동회 시작할 시간이에요. 5분 후에 운동장으로 모여주세요!" 선생님의 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이들은 조카에게 놀이터에 가자고 권했다. 오물오물 과일을 씹고 있던 조카는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궁금한 J는 놀이터를 바라봤다. 직사각형 모양의 모래밭에 노란색 출입 금지선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미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금지선 안에서 모래 샤워 중이었다. 두 아이는 조카를 포기하고, 재빨리 뛰어가 노란색 금지선 아래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녀는 조카 표정을 살폈다. 운동장으로 향했던 조카의 고개가 놀이터 쪽으로 움직였다.


"OO, 놀이터 가고 싶어? 가고 싶으면 고모랑 같이 갈까?"

"아니, 선생님이 저기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어. 안 갈래."


생각지 못한 조카의 대답에 J는 순간 굳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선생님께 혼날까 두려워 억지로 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친구들이 자신을 따돌릴까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그녀는 이 걱정들이 자신의 내면 아이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어린 J는 선생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그래서 늘 조바심이 났다. 곧이어 운동회 재개를 알리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카는 담담하게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뒷모습엔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세상에, 나의 조카가 이렇게 단호한 아이였다니!' 그녀는 낯선 조카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곧이어 조카가 기다리던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조카는 순서를 기다리며 주자의 움직임을 눈으로 열심히 쫓았다. 흡사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대표 같았다. 드디어 조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조카는 비장한 표정으로 선두 주자를 향해 거침없이 내디뎠다. 금세 선두를 탈환한 조카는 마지막 어른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J는 대견한 마음에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OO 멋있다! OO 최고!" 그러나 조카의 시선은 마지막 주자에게 꽂혀 있었다. 경기가 끝나서도 조카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동안 조카의 시야 밖에 머물렀다. 목이 쉰 그녀는, 힘없이 고모 껌딱지의 대변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운동회는 청팀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짐 정리를 끝내고 집에 가려던 찰나, 땀으로 범벅이 된 조카가 말을 꺼냈다. "나 놀이터에 가서 놀아도 돼?" J는 놀이터로 고개를 돌렸다. 놀이터의 출입 금지선이 사라지고 없었다. 새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카는 아이들과 함께 재빨리 놀이터로 향했다.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 조카를 보며 J는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몸을 갈아 끼운 듯,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아이의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존경심이 일었다.




2024년 2월, 조카를 향한 놀라움은 다시 J를 찾았다. 몇 개월 간 준비했던 어린이집 발표회 겸 졸업식이 구청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2시간에 걸친 발표회에서 조카는 여섯 번 무대에 올랐다. 아이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가족들은 경쟁하듯 아이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조카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던 그녀 역시 생애 제일 높은 데시벨로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가족들의 환호에 아이들은 고개를 돌려 가족을 바라봤다. 활짝 웃기도 했다. 그러나 조카의 시선은 선생님을 떠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 손바닥을 펴 작게 흔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무대 중앙의 조카는 다른 몸을 갈아 끼웠다. 날렵하고 유연한 싸이가 That That를 외치며 무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2시간 후, 연예인 싸이는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무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조카는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발표회 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한 줄로 무대에 올라 사진 찍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모여들며 그 줄이 사라졌고, 조카는 이에 실망한 듯 사진을 찍지 않으려 했다. 결국 강당 밖에서 몇 장의 증빙 사진만 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저녁을 먹으며 그 이유를 조카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줄 서서 차례로 찍으라고 했거든. 그리고 사람들이 많아서 사진 찍는 게 부끄럽기도 했어."


순간 J는 궁금했다. 'OO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는 어릴 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자기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내향적이지만 외성적이었던 그녀는, 자신이 마치 세상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모습이 진정한 자기인지 그녀는 늘 궁금했다. 동시에 세상이 그녀의 상반된 모습을 알아차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내향적인 자기를 더 깊은 곳으로 숨겼다. 어릴 적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발랄하고 유쾌한 모습으로만 기억했다.




2025년 J의 조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학교는 근로자의 날을 맞아 학부모 공개수업을 진행했고, 그녀는 작년에 이어 또다시 그곳에 있었다. 공개수업 전 아이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반면, 조카는 자리에 앉아 수업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 밖에서 조카를 불렀다. 그녀 목소리를 들은 조카는 반가운 얼굴로 교실을 나왔다. 그리곤 그녀 품에 안겨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공개수업 전에 교실로 들어오면 안 돼. 그리고 수업 중엔 크게 이름을 부르면 안 돼. 수업 끝나고 나갈 땐 뒷문으로 나가야 해, 알았지?" 조카의 진지한 당부에 그녀는 웃음이 터졌지만,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짧은 상봉 뒤 조카는 조용히 교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조카의 알밤 같은 뒷모습이 귀여워 여러 번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교실 안 조카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고모, 선생님이 앞만 보랬어. 이따 봐."


다음 날 J는 조카에게 공개수업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조카가 말을 시작했다.


"고모, 내가 부끄러움이 많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불편해."

"우리 OO 어제 힘들었어?"

"아니, 재밌었어. 처음엔 부끄러웠는데, 집중하니까 재밌더라고."

"고모 내년에도 공개수업 갈까?"

"당연하지!"


순간, J는 조카의 담담함에 탄복했다. 조카는 부끄러움 많은 자신의 성격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때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기질까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카에게 기질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일 대상이었다.


평소 조카는 그녀와 놀다가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발견하면 함박웃음을 지었다. "OO는 OO가 좋아?" 거울 속 자신과 제대로 대면한 적 없던 J는 이런 조카를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응, 난 내가 좋아. 고모도 내가 좋지?" 여전히 거울에 시선을 둔 채 조카가 물었다. "당연하지!" 그녀는 사랑스러운 조카를 보며 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아이에게도 말을 걸었다. 'J야, 나도 네가 좋아. 너의 여러 면을 진심으로 좋아해. 알고 있지? 이제야 알아서 미안해.' 조카는 자신의 고유함을 사랑하며 순간순간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런 조카를 보며 어릴 적 혼란스러웠던 자신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날 밤, 반짝반짝 빛나던 아홉 살 조카는 J에게 내면 아이와 화해할 수 있는 포근한 찰나의 조각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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