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남자 글 쓰는 여자

by 류다



남편은 원래 책을 잘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십 년쯤 전에 집 정리를 하면서 서가에 꽂힌 남편의 책 중에서 누렇게 바랜 책들을 버린 적이 있었다. 대학교 전공서적도 있었고, 놔두면 자리만 차지할 뿐, 두 번 볼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정리한 것이다. 생전에 쳐다보지도 않던 것을 어찌하여 남편이 알게 되었고 그 이후 남편은 아직도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그때 이혼하고 싶었다'라고 비슷한 레퍼토리를 읊어댄다.


연속극 보는 것을 좋아하던 남편이 5년 전부터 갑자기 TV를 멀리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책에 대한 목마름은 있었으나 인생에 대한 번뇌와 자기 연민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고뇌가 커서 책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았다고 한다. 책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얼마나 책을 읽지 않았는지 무식이 지나쳐서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 남편은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아는 게 많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소한 계기는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직원들에게 이별 선물로 책을 주면서 읽어보게 된 것이었다. 1년에 책 5권도 안 읽던 사람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1년에 50권을 목표로 잡으면서도, '설마 내가 50권을 읽겠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100권을 읽었다. 읽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계속 읽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교 때는 로맨스 소설만 읽었던 남편이 말이다.

남편은 그렇게 독서에 재미를 들여 작년 한 해 동안 200권 넘게 책을 읽었다. 발췌독을 한 것도 아니고 대부분 전체를 완독한다. 직장 생활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이렇게 읽었다는 사실에 나도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1000권 가까이 책을 읽었고, 죽을 때까지 만 권의 책을 읽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그리고, 퇴직하고 시골에 도서관을 짓고 책을 통해서 마음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고 싶다고 한다.



내가 아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을 할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하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남편이 책을 읽는 동안 집안 일과 아이에 관련된 일은 누가 다 하겠는가. 남편이 나보다 퇴근 시간이 조금 빠르고 집에 오면 바로 저녁을 먹으려고 해서 간단히 요리를 하는 일은 분명 늘었다. 대신에 쓰레기 분리수거, 빨래, 청소는 대부분 내가 하게 되었다. 남편은 밥 먹고 동굴 같은 방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술 마시러 가서 12시가 되어야 집에 온다. 금요일 퇴근하면 바로 시댁으로 가서 일요일 오후 늦게서야 집에 온다. 맞벌이인데 남편이 하숙생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숙비 좀 내라고 농담을 할 때도 있었다.


집안일에 무관심하고 가족에게 시간을 쓰지 않는다는 점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집이 책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남편 방은 누워서 잘 작은 공간 외에는 책에 압사당할 정도이고, 거실의 한 면을 차지한 서가도 이중으로 책이 꽂혀 있어 내 책은 찾을 수도 없을 정도이다. 높은 책꽂이 위에도 천장까지 위태롭게 쌓여있는데도 끝없이 책을 주문한다. 새 책보다는 중고책이 더 많으며 누렇다 못해 시커먼 책도 있다. 남편이 주문한 책의 10%쯤은 읽는지 모르겠는데, 당장 읽지 않을 책도 한꺼번에 같이 주문하는 게 문제다. 절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지 않고 전자 책도 싫어한다. 이렇게 포화된 공간임에도 끊임없이 책을 주문하면서 오히려 나보고 책 보관 용도로 전셋집 하나사달라는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할 정도이다. 생활비나 제대로 주고 그런 소리를 할 것이지.


남편이 책을 읽으면서 술 마시는 횟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욱하는 성질부리는 것도 확실히 줄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인이 된 것은 아니다. 거실 술병 투척 사건이나 여자 문제도 한창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남편이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많이 읽으니 모든 힘이 입으로 갔는지, 사실을 날조하거나 자기 합리화의 대가가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책 읽은 자의 힘. 어느 날부터 훈계조의 말이 시작되어서 아이들과 나는 듣기 싫어한다.




남편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블로그에 일상이나 여행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본격적으로 에세이도 쓰기 시작했다. 남편처럼 '책 1000권 완독'같이 내세울 만한 성과는 없다. 브런치에 쓴 글도 겨우 100편이 넘었을 뿐이다. 결국 숫자로 내세워야 한다면 내가 운영하는 두 개의 블로그 포스팅을 전부 합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글을 몇 편 썼다, 책을 몇 권 냈다는 것은 일면 두드러진 업적이 될 수는 있으나 문학은 정량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서 슬픈 자의 자기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우리 부부는 자신의 관심사를 찾아 각자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 끝이 졸혼이 될 것인지 아름다운 상호 존중과 상생이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단지 인생이 우리에게 조금 더 나은 것을 준비해 두었기를 바랄 뿐이다. '책 읽는 남자와 글 쓰는 여자'라고 하면 어쩐지 우아해 보이지 않는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선택이 되기보다는 등을 돌리고 자기의 길을 갈지언정 축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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