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유환(無備有患), 준비가 부족해서 고생길에 이르다
예부터 현명한 사람들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미리미리 준비하여 미래를 대비했다. 소심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혹시라도 닥쳐올지 모를 우환에 맞서는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특히 해외여행은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예상치도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있다. 성격이 느긋하고 대범한 사람은 복병처럼 다가오는 우환도 어떻게든 수습할 것이나, 나는 아직도 작은 일에 멘붕을 경험한다. 영어도 딸리고 관찰력이나 눈치가 부족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열심히 사전 조사를 하는 것이 현지에서 덜 헤매기 위한 방편이었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니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좋았다. 시간과 돈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면 플랜 B, 플랜 C까지 포함해서.
생애 처음으로 갔던 해외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오사카, 교토, 나라, 고베. 같이 가기로 한 친구는 바빴기에 주로 내가 여행 계획을 세웠고, 가기 전에 친구에게 파일을 보냈더니 깜짝 놀란 친구가 편집 기술을 발휘해서 손바닥만 한 미니 북으로 만들어 왔었다. 나도 인터넷에서 떠돌던 파일을 수정하여 여행 계획을 세웠던 건데, 꼭 이대로 다녀야 되는 건 아니라고, 참고용이라고 했으나 아마 말만 그랬을 것이다.
정말 블로그를 통해서 보면 얼마나 여행 계획을 꼼꼼하게들 세우는지 나는 비교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정리하는 것이 귀찮아져서 엑셀 파일에 시간과 동선, 참고사항 정도만 짧게 정리하여 가게 되었다. 가까운 곳을 갈 때는 그마저도 귀찮아서 간단하게 메모만 해서 가기도 했다.
철저한 계획에 기반한 여행은 실수를 줄이고 그만큼 효율적인 여행을 하게 되지만,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흥은 조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처음 보는 풍경이 신기해야 하는데, 이미 인터넷으로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래서 여행 떠나기 3개월쯤 전에 대충 동선을 잡고 항공권, 숙소를 예약한 후 조금 지나서 세부 사항을 알아보았다. 막상 여행을 떠날 때가 되면 이미 내 머릿속에서 많은 부분은 잊힌 후다. 그래서 또 실수를 하게 되고 그것이 여행의 묘미인지도 모른다고 애써 위로하기도 했다.
해외여행 경력이 14년쯤 되니 여행에 대한 열정은 많이 식었지만, 거의 습관처럼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기다리며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게 되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여행 계획표는 점점 짧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현지에서의 당황스러움은 곱절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실수가 연발했고, 그에 따른 경제적, 정신적 타격은 심해졌다.(이에 관해선 '멍청비용'으로 다음에 자세히 적어보려고 한다.) 오죽이면 이제 패키지여행이나 다녀야지 혼자 자유여행은 못 다니겠다고 결심할 정도겠는가. 그러면서도 잊어버리고 또 떠나긴 하지만.
이제 여행 가기 전에는 여행지 조사보다 남은 식구들 밥이 더 걱정이다. 전에는 냉장고 빵빵하게 채워놓고 식단표만 짜놓고 가면 됐는데, 기러기부부가 된 이후론 할 일이 늘었다. 같은 음식을 두 끼 연속해서 먹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이라 반찬은 최소로 해놓고 도시락을 싸서 냉동실에 얼려두거나 냉장실의 식재료를 정리하는 것만도 큰일이다. 여행 떠나기 하루 전에는 밤늦게까지 동동거리느라 그야말로 몸살이 날 지경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엄청 대단하게 음식 준비를 해놓고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반찬가게의 도시락 배달도 시켜보았지만, 아무리 반찬 종류가 바뀌더라도 애들은 금세 물려하더라. 우리 식구들이 여행을 막 좋아하고 그러지는 않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여행을 못 가게 하거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엄마와 함께 가는 여행을 거부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같이 가도 부딪치는 경우가 많다. 아이와 함께 떠날 때는 더욱 철저한 계획이 필요했으나, 혼자 떠나는 여행은 좀 더 자유롭다. 헤매도 좋고 끼니를 걸러도 되고 내 취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노래 가사처럼 준비 없이 비를 맞은 것처럼 낯선 곳에서 당황할지라도, 그것이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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