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날들이여, 안녕

by 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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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는 내 추억의 앨범 속 빛바랜 사진처럼 흐릿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부산이 멀지 않아 가끔 여행을 갔지만, 광안리나 해운대, 다대포 까지 가 놓고선 태종대는 늘 후순위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올여름엔 마음의 각오를 하고 혼자 부산 태종대에 갔다. 내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결혼할 때 앨범 속 사진은 두 세장만 챙기고 대부분 친정에 두고 왔다. 흑백사진으로 시작하는 앨범을 넘기며 나의 지나간 시간을 반추해 보았다. 사진 속의 내 모습은 내가 아닌 듯 어딘가 낯설고 촌스러워서 부정하고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버려두고 온 지 20여 년이 흘러도 태종대 계단에 선 흰 바람막이 잠바를 입은 커트 머리를 한 사진, 노을이 질 무렵 몰운대에서 빨간 점퍼를 입고 눈을 감은 채 찍은 사진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 시절 우리는 기차를 타고 당일치기 부산 여행을 가끔 했다. 가슴속 응어리진 무언가가 우리를 부산 바다로 이끌었다. 원하는 삶은 요원했고, 삶에 지치고 절망에 빠져, 혹은 그냥 바다 바람을 쐬고 싶어서 훌쩍 떠났다. 아무런 대안도 없는 스스로가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30장 정도 찍을 수 있는 코닥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사서 추억을 남기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당일치기 여행에서 돌아와 집 근처의 사진관에 맡겨 필름을 인화했다. 사진 초보라 빛 조절도 못해서 사진의 한쪽 귀퉁이가 보라색으로 인화되거나 너무 밝아서 이상하게 보이는 사진이 많았다.

친구와 놀러 간 태종대에서 몽돌 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보며 상념을 파도에 실어 보냈던 그 시간. 몽돌을 바다에 던지기도 하고 예쁜 돌을 찾기도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가진 것 없이 꿈만 원대했던 그 시절,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하며 푹푹 한숨을 쉬곤 했지만, 고민을 얘기할 친구가 있어 덜 외로웠다. 이제 서로의 인생에서 부재자가 되어 버렸지만, 그때의 우리를 부정하진 말자. 외로움과 자기혐오 속에서 힘겹게 자맥질하던 내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게 버팀목이 된 것은 가족이 아니라 친구였다. 그땐 그랬지.


지금은 서로의 삶과 마음이 젊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친구가 나에게 가장 친절했을 때는 어쩌면 내가 불행의 길목에 서있을 때였다. 이런 생각이 전부터 들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가 나중엔 돌이키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웠다. 청춘시절부터 중년이 되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불안, 기쁨의 시간을 나누던 관계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모든 관계는 변한다. 오래된 부부가 그렇듯, 친구도 떨어져 살면서 비슷한 밀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좀 더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족처럼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지나치게 솔직하게 대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서로에게 불쾌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친구는 문을 닫아버린 것이겠지.



그날 나는 바다에서 묵은 감정의 찌꺼기와 미화된 시간들을 지우려고 떠났다. 다 버리고 온 것일까?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과 속 좁은 '너'의 잘못에 대한 원망은 파도에 실어 보냈다. 어쩌면 다시 밀물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과거 부정이 아닌 모든 시간을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따스한 화해.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마음껏 그 시간을 그리워하기로. 언젠가는 멀어질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나치게 관계에 몰입하지 않기를. 나의 부족함도 인정하고 오늘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빌어본다.



#친구 #관계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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